공포단편) 벚꽃마을 404호에서 돈 받아와
- 공포 괴담
- 2022. 2. 25.
따귀 한 대에 코피가 터졌고,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납작 엎드려 빌었다.
“살려만 주면 뭐든 다 한다고?”
권 사장은 실실거렸다. 권 사장의 손짓에 덩치가 좋은 친구가 내 목덜미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권 사장이 쪼그려 앉아, 바닥에 달라붙은 나를 내려다봤다. 꽉 끼는 양복바지가 잘 익은 소시지마냥 터질 거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는 이빨을 보이며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미소를 보였다. 금니가 반짝였다.
“최형민씨? 최형민씨?”
“네!”
“진짜로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순간 머릿속에 오만가지 잡생각이 떠올랐다. 뭘 시키려고 하지? 잔심부름? 마약운반? 살인교사? 공포에 질린 뇌는 내게 극한상황만 보여줬다.
결론적으로 뭐가 되었든 맞는 건 싫었다.
“벚꽃 마을 404호에서 돈 받아와”
귀싸대기를 풀스윙으로 맞은 터라 귀가 윙윙거려 잘 들리지 않았다.
“네?”
권 사장은 내 귓불을 고무줄마냥 잡아당기고는 소리쳤다.
“벚꽃 마을 404호에서 돈 받아오라고!”
그 말에 권 사장의 밑에 놈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돈을 받아오라고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 받아 오는 건 그쪽이 프로일 텐데.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라는 명언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지 않았는가?
거기다가 벚꽃마을 404호라니, 이 불필요하게 구체적인 주소는 뭘까?
줄줄 새어 나오는 코피를 훔치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정확히는 일으켜졌다.
“최형민씨, 뭐든 한 다고 했잖아? 할 거지? 싫어?”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자연스레 눈을 깔게 되었고, 내려간 시선의 끝에서 흉기를 연상시키는 그의 무지막지한 손을 봤다.
‘저걸로 또 맞는다고?’
선택권은 없었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됐네. 잘 되었어, 아주 잘 되었어.”
그는 옆에 있던 사람에게 손짓했다.
“상철아, 김 사장한테 좋은 비즈니스가 생겼으니까 공터로 나오라고 전화 좀 걸어라”
“네, 형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갔지만 더 이상 맞지 않겠다는 생각에 안도해버렸다.
잠시 후 고급 외제차가 공터에 도착했고, 거기서 힘 꽤나 쓸 거 같은 어깨들이 내렸다.
그 중 가장 덩치가 큰 한 놈이 크게 소리쳤다.
“권 사장 나왔어! 얼마나 좋은 비즈니스 길래, 바쁜 사람을 오라고 그러는 거야”
그는 담배연기를 뿜으려 천천히 걸어왔다. 연기가 천천히 걷히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었지만 풍겨오는 위압감 때문에 클로즈업 되는 그의 얼굴을 끝까지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권 사장이 불러낸 김 사장이었다.
“밤중에 선글라스는, 모자란 새끼”
“패션도 모르냐, 새끼야. 근데 비즈니스가 뭔데?”
김 사장의 물음에 권 사장은 나를 가리켰다.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고, 선글라스를 뚫고 나오는 그의 험상궂음에 고개를 숙였다.
“누군데?”
“이 놈 거기 보낼 거야”
“어디?”
“벚꽃마을 404호”
권 사장이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고, 김 사장은 잠시 어이없어 하다가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그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공터에 울렸다.
“그 귀신 붙었다는 집? 쫄보 새끼야 건달 때려 쳐! 무슨 귀신이야, 그 말 할라고 불렀냐?”
“씨발, 네가 안 믿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그 때 내기는 기억나지?”
“진짜 하시려고요 형님?”
상철이가 말렸지만 권 사장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밀어붙였다.
“1억 내기?”
“그래, 귀신이 있나, 없나 1억빵”
권 사장의 도발에 김 사장은 박수를 치며 그가 데려온 패거리를 둘러봤다.
“권 사장, 이자놀이로 돈 좀 만졌나보다? 아주 돈을 퍼줄려고 환장을 했네. 귀신이 어디에 있다고 지랄이십니까?”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콜, 1억 가져와. 참고로 난 현금만 받는다?”
김 사장이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눈깔을 보이며 말했다.
“잘 됐네. 잘 되었어, 아주 잘 되었어. 거래 성사 된 거다,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
“그래서 뭐 어떻게 할 건데?”
“여기 최형민 씨를 벚꽃마을 404호로 보낼 거야. 그래서 귀신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김 사장이 나한테 1억을 주는 거고, 이놈한테 아무 이상 없으면 내가 1억을 줄게”
김 사장은 나를 노려봤다.
“그 사람을 내가 어떻게 믿어? 누군줄 알고?”
권 사장은 두꺼운 팔뚝을 내 어깨에 올리려했다.
그냥 어깨동무였는데 그가 팔을 드는 동작에 나도 모르게 맞는 줄 알고 눈을 찔끔 감으며 움츠렸다.
“아니, 최형민씨 사람들 오해하겠어.”
권 사장은 너스레를 떨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의 옆에서 다소곳이 그의 팔뚝 거치대가 되었다.
“뭐야 저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내기를 해?”
김 사장이 따지자 권 사장은 능글맞게 대답했다.
“최형민 씨는 우리한테 돈을 좀 빌린 사람인데 그냥 거기서 돈만 받아올 거야, 아니 돈을 못 받아 와도 돼, 그냥 그 재수 없는 벚꽃마을 404호에 갔다만 올 거야. 근데 중요한 포인트!”
“뽀인트?”
“최형민씨는 벚꽃마을 404호에 갔다 와서 아무 일도 안 생기면 빚
전액 탕감”
빚을 탕감해준다는 소리에 옆에 있는 권 사장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거기 최형민이라는 사람은 벚꽃마을 404호에 갔다 와서 아무 일도 없으면 빚이 사라진다? 그럼 나랑 같은 편이네? 귀신이 없어야 되니까”
“오케이, 이해 됐지?”
“간단하고만, 1억 벌기 쉽네. 권 사장 너는 도박 절~대 하지 마라”
김 사장은 윗니 아랫니 모든 치아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주먹도 들어갈 만큼 입이 굉장히 컸다.
“김 사장 네가 벚꽃마을 404호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귀신이 안 붙고 못 배겨.”
권 사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금니가 또 다시 번쩍였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광택이 났다. 오고가는 대화가 정상적이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이해했다.
벚꽃마을? 귀신? 1억? 빚 탕감!
벚꽃마을 404호에 대한 궁금증이 무럭무럭 자라남과 함께 나는 어느 샌가 검은색 차 뒷자리 실렸다.
뒤이어 덩치 좋은 건달 둘이 앞에 탔다. 그렇게 나는 두 명의 어깨들과 함께 미스터리로 가득한 벚꽃 마을 404호로 향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았고, 권 사장 패거리의 막내가 운전을 맡았다.
김 사장 쪽 사람은 조수석에 앉았다. 그들의 임무는 감시였다. 내가 도망을 가는지와 내기가 제대로 진행되도록 지켜보는 역할이었다.
차안은 조용했다. 둘 다 말단이라 그런지 말이 별로 없었다.
특히나 운전을 맡은 돼지감자?(권 사장도 그렇고, 그의 오른 팔로 보이는 상철이라는 사람이 돼지감자라고 불렀다, 닉네임을 정말 찰떡같이 잘 지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군은 상당히 겁을 먹은 거 같았다.
그는 권 사장에게 운전수로 지목될 때도 그랬었다.
그때, 그의 눈은 겁에 질려있었다.
“돼지감자야, 네가 벚꽃마을까지 데려가서 감시해라”
권 사장의 명령에 체격이 퉁퉁한 아니, 명백히 뚱뚱한 그리고 조금은 앳되어 보이는 남자의 째져 있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래, 돼지감자야, 네가 갔다 와, 너 예전에 민철이랑도 한 번 가봤잖아?”
상철이가 돼지감자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상철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네, 알겠습니다.”
돼지감자군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와 반대로 호명되지 않은 다른 놈들은 안도하는 듯 했다. 정말로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괜찮다니까, 어차피 너는 아파트 앞에서 감시만 할 거야. 저기 최형민씨 혼자 404호에 갈 거니까”
상철이는 돼지감자군을 토닥이며 차키를 건넸다.
그랬다. 돼지감자군, 그는 내가 가야할 벚꽃마을 404호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공터에는 보는 눈이 많아 물어보지 못했지만 차 안에서는 뭔가 물어볼 수 있을 거 같았다.
상대적으로 나와 동행하는 둘은 외모부터 흉악함이 덜 했다.
특히 돼지감자군은 동글동글 한 게 이모티콘 캐릭터처럼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덕분에 상대하기에 정신적 허들이 낮았고, 나는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죄송한데 뭐 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
“네? 네, 물어보세요.”
내 물음에 운전을 하던 돼지감자군이 반응했다.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는 그의 반응이 사무치게 반가웠다.
“아까 전에 말씀하시는 거 언뜻 들었는데 벚꽃마을 404호에 가보신 적 있다고 하셨잖아요?”
내 물음에 룸미러로 비치는 그의 낯빛이 달라졌다. 발자국이 찍힌 시멘트 같이 일그러졌다.
그는 두툼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대답했다.
“네, 예전에 민철이 형님이라고 계셨었는데 그 형님이랑 가봤습니다.”
대답을 꺼려할 줄 알았는데 돼지감자군은 성실히 대답해줬다.
순간 조수석에 앉아있던 김 사장 패거리의 똘마니가 놀라며 물었다.
“민철이 형님이라면 전에 돌아가신?”
“네 그때 장례식장에 오셨었죠?”
“아, 네 그때 저희 만났습니다.”
앞자리에 앉은 둘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잠깐의 대화를 통해 이 둘은 구면이고, 얼마 전 권 사장 아래에 있던 민철이라는 사람이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름의 정보였지만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돈을 받으러 가야할 벚꽃마을 404호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특히 귀신이 나온다는 부분, 물론 귀신같은 거 믿을 리가 없지만 믿지 않더라도 궁금한건 어쩔 수 없었다.
“아, 가보셨구나, 그럼 정말 귀신이 나오나요?”
내 물음이 끝나는 동시에 신호가 걸려 차가 급하게 멈췄다.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나?
걱정했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핸들을 잡고 있던 돼지감자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신호등을 한 번 바라보고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정확히 귀신이 나오는 건 아니고, 사실 그 집 딸이 내림을 받았거든요. 신 내림”
약간 사투리 억양이 섞인 그의 대답이 끝나고, 잠깐이었지만 등에 소름이 돋았다.
물론 나는 귀신이나 무당은 전혀 믿지 않는다. 하지만 돼지감자군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올 때 몸이 절로 반응했다.
“진짜요? 소문이 사실이었나?”
조수석의 남자도 놀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쪽 대부업계에서는 소문이 어느 정도 있는 이야기처럼 보였다.
“신 내림을 받았다고요?”
“네, 사채도 그래서 썼을 걸요? 그 집 부모가 내림 막아달라고 무당한테 돈을 막 갖다 바쳤나 봐요. 그렇게 있는 돈 없는 돈 모아다가 쏟아 붓다가 아마 남편이었나? 부인이었나? 아무튼 사고로 죽고 그 다음부터 포기하고 내림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돼지감자군은 꽤나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뭔가 구린 건 분명했다.
아무리 신 내림을 받은 집안이라고 해도 건장한 남자들이, 그것도 조폭들이 겁을 먹는다고?
“최형민씨라고 했죠?”
“네?”
“귀신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조심하셔야 돼요.”
“조심하라고요?”
돼지감자군은 무게를 잡으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거기, 벚꽃마을 404호에 돈만 받으러 갔다하면 안 좋은 일이 막 일어납니다. 큰 형님 금니 보셨죠?”
순간 권 사장의 실실거리는 웃음과 함께 반짝였던 금니가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벚꽃마을 404호에 돈 받으러 갔다 오는 길에 교통사고 나서 강냉이 나간 겁니다. 운전을 하셨던 형님이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와서 그거 피하려다가 사고 났다고 했는데”
“우연한 사고 아닙니까?”
“근데 도로에는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귀신을 본 거지요”
순간 나도 모르게 창밖의 풍경을 봤다. 날은 어두워졌고,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돼지감자군은 계속해서 말했다.
“뭐 그 정도 사고면 다행입니다. 벚꽃마을 404호 갔다가 죽은 형님들도 있습니다.”
돼지감자군의 말이 끝나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뒤에 있던 차의 빵빵 거리는 클랙슨 소리에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혹시 민철이 형님도 귀신 때문에 죽으신 겁니까?”
조수석 남자의 물음에 돼지감자군은 액셀을 밟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내가 귀신이나 무속을 아예 믿지 않아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정말 죄송한 질문인데, 그 귀신 때문에 죽으셨다는 민철이 형님이라는 분,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돼지감자군은 운전석 창문을 살짝 내렸다. 좁은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봄이었지만 밤바람은 찼다.
찬바람이 돌고, 돼지감자군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쇼크사랍니다. 갑자기 쇼크사라니, 웃기지 않습니까?”
“아니, 근데 쇼크사 했다고 귀신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건 좀”
그의 말에 의문을 가진 나는 따지 듯 물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곧장 대답했다.
“죽기 전에 계속 귀신이 보여서 미치겠다고 했습니다.”
“민철이 형님이요?”
돼지감자군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그는 상기된 톤으로 말을 이었다.
“그 사나이였던 형님이, 귀신이 보여서 잠을 못자겠다고 술 퍼마시고, 나중에는 제정신으로 못 있겠다고 뽕까지 하셨습니다. 덕분에 같이 생활했던 저도 엄청 피곤했습니다.”
“뽕이요?”
조수석 남자가 크게 놀라며 되물었다.
“뽕이라면 마약 말씀하시는 거죠?”
“네, 밤마다 못자겠다고 뽕을 맞아서 팔에는 주사 자국이 숭숭 나있고, 눈은 퀭해가지고 큰 형님한테도 눈깔 재수 없다고 막 혼났습니다. 결국에 큰 형님한테 뽕 맞는 거 걸려가지고, 갖고 있던 뽕 다 버리고, 완전 폐인이 됐습니다. 이러다가 조직에서 쫓겨나겠다고 하시면서,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술만 억수로 마셨거든요. 맨 정신으로 힘들다고. 그러다가 결국 뭐, 그렇게 되셨습니다.”
돼지감자군은 말을 마치고, 찝찝한지 괜히 두꺼운 허벅지를 긁적였다.
차안의 공기는 답답할 정도로 무거워졌다. 그의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차가 신호에 걸려서 섰다.
“민철이 형님이 귀신 붙어서 돌아가셨구나.”
조수석에 앉아있던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혼자 중얼거렸다.
돼지감자군이 친절히 설명해 줬지만 죽기 전에 귀신이 보였다는 것도, 그가 쇼크사를 한 이유가 귀신 때문이라는 것도 아직 믿기 힘들었다.
“여긴 신호가 좀 기네요. 말을 많이 했더니 입이 좀 마른데 이거 마실래요?”
잠깐 여유가 생긴 돼지감자군은 대시보드를 열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뭡니까?”
“이거 돼지감자즙인데 목마르시면”
돼지감자즙이라는 말에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아냈다.
“하나 하실래요?”
그가 내게 누런 갈색 포에 담긴 돼지감자즙 하나를 건넸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 돼지감자즙, 그래서 그 사장님이랑 그 형님들이 돼지감자라고”
“예, 제가 맨날 이 돼지감자즙을 입에 달고 살아서 형님들이 별명으로 그렇게 부릅니다.”
그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건강식품치고는 먹을 만하네요.”
어느새 조수석 남자는 입에 돼지감자즙을 물고, 쭉쭉 빨며 말했다.
“제가 당뇨가 있어서, 이 돼지감자가 당에 좋다고 해서 챙겨먹고 있습니다.”
“아, 당이 있으신가 봐요. 저희 어머니도 당수치가 높아서 식단 관리하시거든요.”
혈당 수치가 높으신 어머니 덕분에 당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
음식도 가려서 먹어야 하고, 운동도 필요했다. 심한 경우에는 인슐린 주사도 맞아야 하니, 정말 골치 아픈 질병이다.
“제가 아직 나이는 어린데, 몸이 이렇다 보니 그래도 인슐린 주사 맞고, 돼지감자즙도 먹고, 운동도 하면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돼지감자군은 자신의 몸을 스캔하며 말했다.
“인슐린 주사요?”
순간 어두운 기억과 함께 뭔가 뇌리를 스쳤다.
“네, 인슐린 주사요. 맞다, 그거 때문에 웃긴 일 하나 있었는데, 민철이 형님 때문에 큰 형님이 조직원들 뽕 검사한다고 했거든요. 다 팔뚝 걷어서 주사자국 본다고. 저 그때 뒤질 뻔 했습니다. 인슐린 주사 때문에 저도 뽕 하는 거 아니냐고 하하하”
그는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옆에 조수석 남자도 웃었지만 나는 뭔가 뇌리에 스쳐 웃을 수 없었다.
정말로 귀신 때문에 죽었을까? 다른 가능성은 없는 걸까? 귀신을 철저하게 믿지 않기 때문에 의문이 생길 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조수석 남자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냥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지를 남겨두며 입을 열었다.
“어떤 가능성이요?”
“아까 민철이 형님이랑 같이 생활하셨다고 했죠?”
“네, 사무실 건물에 딸린 숙소에서 같이 지냈습니다.”
돼지감자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가능성이 좀 더 커지네요.”
“어떤 가능성이요?”
“민철이 형님 쇼크사가 귀신 때문이 아니라 저혈당 때문에 일어난 쇼크사라면?”
순간 신호가 바뀌고 차는 다시금 벚꽃마을 404호를 향해 출발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저혈당 쇼크사면 뭐가 달라집니까?”
돼지감자군은 궁금한 투로 물었다.
“사망하기 전날 술을 마셨다고 했죠? 민철이 형님이 취해서 실수로 본인 팔뚝에 인슐린 주사를 놓았다면 어떨까요? 마약이랑 착각하고 실수로 투여했다는 가능성이 있단 말입니다. 일반인은 인슐린 주사를 과다투여하면 저혈당 쇼크로 죽을 수도 있거든요.”
“정말요? 인슐린 주사가 그렇게 위험한가요?”
돼지감자군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당 환자가 아닌 일반인이 많은 양을 투여하면 위험합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조수석 남자의 말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가 시도해봐서 압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떠올랐다. 다단계가 늪이란 걸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사채는 불어났고, 불어나는 이자는 나의 삶을 갉아먹었다. 그쯤 나의 자살시도는 시작됐다.
누군가는 3000만원에 삶을 포기 하냐고 하겠지만 평생 갚아도 3000만원이 줄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렇지만 나는 너무나도 고통을 싫어했기에 최대한 고통이 없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인터넷에는 나 같이 고통 없이 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정보들로 넘쳐났다.
그 중 하나가 어머니의 인슐린 주사를 이용한 자살이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죽음에 다다르지 못해 지금까지 살아있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내가 제시한 가능성에 그 둘은 혼란에 빠졌다. 특히 돼지감자군은 충격을 크게 받은 듯했다.
“그렇지만”
돼지감자군이 말을 하려 했지만 내가 말을 자르고 바로 물었다.
“혹시 그쪽의 인슐린이나 주사 양이 줄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그는 말을 하려다 멈췄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내 예상이 맞는 듯 했다.
“아, 저는 그게 저희 사장님이 직원들 뽕 검사할 때 뽕인 줄 알고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맞네요, 맞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주사도 그렇고 줄었습니다.”
“뭡니까! 그럼 귀신 때문에 죽은 게 아닌 겁니까?”
조수석 남자가 놀라며 물었다.
“그렇지만 민철이 형님이 귀신을 봤다고 했습니다.”
돼지감자군은 하소연하듯 말했다. 내가 제시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쇼크사가 인슐린 주사 때문이라면 민철이 형님의 죽음에 자신의 탓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건 마약을 해서 환각을 본 게 아닐까요? 마약하면 환각증상이 있잖아요.”
“벚꽃마을 404호를 다녀오고 나서부터 뽕을 하신 거 같았는데”
돼지감자군은 확신이 없었는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건 모르죠. 민철이 형님이 그 전부터 마약을 했는지는, 저도 제 말이 정답이라는 게 아니라 그저 가능성을 제시한 거뿐입니다.”
나는 돼지감자군이 내뱉는 모든 주장을 받아쳤다. 돼지감자군은 입맛만 다실 뿐 말을 하지는 않았다.
말문이 막혔는지 침묵이 길어졌다. 생각이 많아보였다.
믿음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경우 사람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 믿음을 견고히 하려고 그 의문을 외면하거나, 그 의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믿음이 잘못 되었나 확인 하거나.
“사실 최형민씨 말을 듣기 전에는 당연히 귀신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민철이 형님이랑 벚꽃마을 404호에 처음 갔을 때, 그 형님이 그 귀신들린 여자를 때렸거든요. 그래서 원한을 샀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돼지감자군은 그 날 일을 떠올렸다.
“이자를 원금만큼 냈어요! 근데 또 돈을 내놓으라고요?”
여자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돈 빌릴 때 계약서 썼잖아? 계약서대로 돈을 더 갚으라고”
민철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과격한 분위기에 돼지감자군이 눈치를 봤다.
“사기꾼 새끼들”
여자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순간 민철의 손바닥의 그녀의 가녀린 뺨을 내리쳤다. 찰진 타격 음과 함께 그녀의 머리가 휘날리며 고개가 돌아갔다.
“뭐? 사기꾼? 이게 미쳤나, 재수 없는 년이!”
순간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마치 장난감 목이 돌아가듯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돼지감자는 뒤에 서있어서 그녀의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알 수 없는 공포감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유지한 채 민철을 보며 소리쳤다.
“네 새끼는 절대 편안히 눈 못 감는다! 절대로 곱게 못 죽어! 눈깔은 뒤집어진 채, 숨을 헐떡거리며 고통스럽게 뒈질 거야, 꺄하하하하”
다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려보이는 그녀에게서 나이 대에 맞지 않는 걸쭉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배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웃었다. 민철은 당황했는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재빨리 그녀의 집에 있던 얼마 안 되는 현금을 챙겨 후다닥 나왔다.
그리고는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귀신이 보인다고 했다.
그는 죽기 전까지 귀신이 보인다고 했고,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잘 수 없었다.
결국 민철은 그녀가 말했던 대로 눈깔이 뒤집어진 채 죽어버렸다.
“정말 단순한 사고사였을까요?”
돼지감자군에게는 아직도 의문이 남은 듯 했다.
“적어도 그 신 내림받은 여자 혹은 귀신의 짓이라고 맹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모든 사건이 벚꽃마을 404호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근데 한 사람 더 있습니다.”
“네?”
“그게 사실 벚꽃마을 404호에 다녀와서 죽은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돼지감자군의 말투가 전과는 달랐다. 확신보다는 의문의 냄새를 풍기는 어투였다. 마치 내게 질문을 하는 뉘앙스였다.
“그게 누굽니까?”
“상백이 형님이라고 앞서 말씀드린 귀신을 보고 교통사고를 내신 형님입니다. 그 형님이 민철이 형님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귀신을 봐서 교통사고를 냈다는 그 운전하던 사람이었다.
권 사장에게 금니를 만들어준 장본인이자, 첫 사망자.
“상백이 형님? 상백이 형님이요? 그 형님은 자살 했다고 들었는데”
조수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조수석의 남자, 정보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은 자살하신 겁니까?”
조폭이 자살이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저희 사무실 옥상에서 뛰어내리셨습니다.”
“엥? 그럼 그냥 자살 아닌 가요? 그것도 벚꽃마을 404호랑 연관이 있나요?”
자살조차 귀신의 탓으로 돌리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 형님이 자살을 할 리가 없는데 자살을 했습니다.”
돼지감자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스스로도 의문인 모양이었다.
“자살할 리가 없다는 말은?”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중국집에 자장면 시켜놓고 자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돼지감자군은 그날 일을 떠올렸다.
“돼지감자야, 중국집에 전화해서 자장면 좀 시켜”
상백은 입에 담배를 문 채, 사무실문을 나가며 말했다. 사무실 문고리를 잡은 그의 팔은 문신이 가득했다.
“지금 시킬까요?”
“바로 시켜, 민철이는 늦는 다니까 네 거랑 내 것만”
“알겠습니다.”
돼지감자군은 핸드폰으로 주문을 했다. 순간 다시 사무실 문이 열리고 상백이 반쯤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곱빼기로 시키고, 단무지 많이 달라고 해”
“네, 형님”
시간이 지나고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자장면 왔습니다.”
돼지감자는 육중한 몸을 의자에서 일으켜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창문 밖으로 시커먼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불길함에 돼지감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성큼성큼 창밖을 향해 다가갔다.
날씨는 쾌청했고, 사람들은 소란스러웠다.
푸른 하늘 아래 가장 낮은 바닥에는 피떡이 되어 아스팔트에 들러붙은 상백이 있었다.
팔의 문신은 뼈가 부러지며 모양이 일그러졌고, 피가 물들어 기괴하게 변했다.
돼지감자군은 뭔가에 홀린 듯 그 장면을 내려다봤다. 순간 문 밖에서 다시금 소리가 들렸다.
“자장면 왔습니다!”
차가 멈췄다.
“그 건장한 형님이 어떤 몸싸움의 흔적도 없이 떨어지셨는데, 그러면 혼자 스스로 뛰어 내리셨다는 말입니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럼 자장면은 왜 시키라고 한 건지”
돼지감자군은 의문을 마구 쏟아냈다. 의문점은 분명히 많았다.
“좀 이상하긴 하네요.”
“그때가 교통사고 나고 얼마 안 된 터라, 괜히 귀신에 홀린 거 아니냐는 말이 돌다가 민철이 형님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벚꽃마을 404호 갔다가 원한을 사서 그랬다는 식으로 되어버렸습니다. 상백이 형님도 404호에 가서 그 여자한테 막 욕하면서 협박했거든요.”
“단순히 발을 헛디뎌서 그랬다 거나, 그런 건 아닙니까?”
“최형민씨 말대로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한데 이상하잖아요. 맨날 옥상 가서 담배피던 형님인데 미끄러졌다는 것도 이상하고, 또 옥상 구조상 그러기도 애매합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정말 자살이거나, 실수로 발을 헛디뎠거나.
자살로 보기에 자장면이라던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실족사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앞선 두 가지 가능성을 제외하면 돼지감자군 말대로 귀신 때문인데, 그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다.
“상백이 형님의 경우는 정말 이상하네요.”
벚꽃마을 404호를 앞두고, 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진짜 뭐가 있나?
“어쨌든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벚꽃마을 아파트 단지입니다.”
차는 단지 내 주차장에 세워졌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아파트 단지의 모습이었다.
고층이 아닌 5층 이하로 구성된 조그만 아파트 단지였다. 눈에 띄는 건 아파트 주변에 심어진 많은 벚꽃 나무들이었다.
봄을 맞아 만개한 벚꽃은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반짝였다.
돼지감자군은 그 아름다운 벚꽃 길을 뚜벅뚜벅 가로질러 갔고,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벚꽃마을 4동 입구에서 돼지감자군은 멈췄다. 쭉 둘러보니 불길하게 4층만 불이 켜져 있었다.
돼지감자군은 전화를 걸었다. 그의 형님과 통화를 하는 듯 했다.
“형님 도착했습니다. 뭐 이상한 건 없었습니다. 신호가 계속 걸려서 좀 걸렸습니다. 3000만원이요? 네, 형님 알겠습니다.”
돼지감자군은 통화를 마치고,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갔다 오시면 되겠습니다. 받아와야할 돈은 3000만원인데, 못 준다고 하면 그냥 오셔도 된다고 하십니다. 404호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돼지감자군이 내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처음엔 무조건 귀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차에서 말씀을 듣고 보니 솔직히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돼지감자군은 예의가 바른 친구였다. 나는 뒤를 돌아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조수석의 남자는 담배를 물었고, 돼지감자군은 주머니에서 돼지감자즙을 꺼냈다.
입구에 들어가고, 나를 마주친 건 계단이었다. 저층이라 승강기가 없었다.
나는 계단을 오르기 전 한숨을 내쉬었다. 권 사장이 떠올랐다.
내게는 귀신보다 근육으로 뭉쳐진 권 사장이 훨씬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빨리 끝내자는 생각에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올랐다. 하지만 4층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속도가 줄었다.
허벅지와 무릎이 저려오는 것도 있었지만 404호 문짝의 기이함도 한몫했다.
알 수 없는 한자와 종이가 붙어있고, 벽은 뭔가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404호라는 글씨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문 앞에서 한참 고민했다.
문을 두드릴까, 초인종을 누를까.
결국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계십니까?”
몇 초 지나서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고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저기 다름이 아니라 돈 받으러 왔습니다.”
“네?”
대답과 동시에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되는 순간, 좁은 문틈으로 긴 생머리의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하얀 피부 톤에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맑은 느낌의 얼굴이었다. 설마 이 여자가 귀신 내린 여자인가?
생각도 잠시 문고리 너머 그녀의 손아귀에 반짝이는 뭔가가 들려있는 걸 보고 기겁했다.
그녀의 손에는 날이 시퍼런 칼이 들려있었다.
“으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내가 뒷걸음질 치자 그녀는 칼을 쥔 손을 옆으로 휘저으며 설명했다.
“죄송해요. 놀라셨구나, 이거는 지금 과일 깎다가 급하게 나오느라”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심장은 더욱 두근거렸다.
“일단 들어오세요.”
그녀는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건 일반 가정집이라기보다 점집이라고 표현할만한 인테리어였다.
제사상 같은 게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차려져 있었고, 벽에는 화려하다 못해 정신 사나운 병풍이 있었다.
베란다 창가 쪽에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서서 나를 노려봤다.
밤중에 남자가 돈 받으러 온 모양새니, 어찌 보면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머쓱해진 나는 어머니께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신 내림을 받았다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안방으로 향했다.
안방은 거실보다 더욱 점집 같았다. 이상한 그림과 부적, 제단 같은 것도 있었다.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성격상 점집 같은 곳은 가본 적이 없어 기묘함을 풍기는 내부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알록달록한 방석에 앉더니 의심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일단 여기 앉으세요. 근데 정말 돈 받으러 오신 분 맞나요? 암만 봐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네?”
그녀와 나는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았다.
“원래 오던 분은 안 오고, 다른 사람이 와서요. 그리고 깡패, 사채업자처럼은 안 보여서”
그녀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런 사람은 아니고, 저도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왔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테이블 밑에서 검은색 가방을 주섬주섬 꺼내며 물었다.
“그래서 얼마예요?”
“제가 듣기로는 3000만원 받아오라고 했거든요, 3000만원”
그녀는 아담한 손으로 검은색 가방에서 5만원 묶음을 하나씩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그녀가 숫자를 세며 테이블에 신사임당 뭉치를 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돼지감자군이 못 받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녀는 의외로 쉽게 돈을 꺼냈다.
“한 묶음 당 500만원, 곱하기 6은 3000만원 맞죠?”
“네, 맞아요. 그나저나 현금이 엄청 많으시네요. 돈 받기 힘들 거라고 들었는데”
“네? 그동안 권 사장이 저한테 뜯어간 돈이 얼만데요. 그리고 저 이래 보여도 비싼 점쟁이예요. 신 내림 막아주던 무당이 꽤나 이름 있는 무당이었는데 그 무당을 뚫고 신 내림을 받아서, 굉장히 강한 신이 들어왔다고 유명해졌거든요. 내림 받고나서 소문 듣고 오는 사람들 점 봐주다보니 입소문이 나서 지금은 꽤 많은 돈을 벌고 있어요.”
그녀는 뭔가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자부심을 보였다.
“대단하시네요.”
“근데 진짜로 이번에 3000만원 주면 이자는 끝인 거죠? 권 사장한테 확실히 전해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더 이상 뜯어내려고 하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도대체 얼마를 뜯어가는 건지”
그녀는 테이블에 있던 돈뭉치를 종이가방에 담으며 말했다.
왠지 투덜거리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돈을 담던 그녀가 정면을 바라봤고,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갸우뚱하며 물었다.
“근데 왜 당신을 보냈을까요? 그 뚱뚱한 분도 안 보이고, 전에 왔던 사람들이랑은 다르네요.”
“다르다니요?”
“전에 왔던 사람들은 오자마자 상 뒤집고 욕하고 때리고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물론 그때는 갚을 돈이 없어서 더 과격하게 했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내게 돈이 담긴 종이가방을 건넸다.
“그 전에 왔던 사람들 죽었어요.”
덤덤한 투로 대답했다.
“네? 죽었다고요?”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동그랗게 뜬 게 마치 귀여운 고양이처럼 보였다.
“모르셨나 봐요?”
“당연히 모르죠. 그 인간들이랑 안부 묻고 지내는 것도 아니고, 왜 죽었대요? 깡패니까 막 싸우다 죽었나?”
“그냥 뭐 사고로 죽은 거 같은데, 웃긴 건 그 인간들 귀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요.”
“귀신이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내가 돼지감자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풀었다.
벚꽃마을 404호에 들렀다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이빨이 빠져 금니를 하게 된 권 사장부터,
그녀의 따귀를 때렸던 민철이라는 사람이 죽엇다는 것과 자살을 하게 된 상백이라는 사람까지.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일들 때문에 권 사장이 여기 오는 걸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 무지막지한 인간이? 그래서 직접 돈 받으러 안 온 거구나, 아 짜증나. 그딴 멍청한 인간이 뭐가 무서워서 벌벌 떨며 살았는지, 돈이 문제네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내가 옳았다.
권 사장 패거리, 공포의 대상이었던 벚꽃마을 404호 여자는 미스터리한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승리감에 빠졌다. 나는 이겼다.
멍청한 깡패들 덕분에 공짜로 빚을 탕감하게 생겼다. 뭔가 들뜬 마음으로 그녀가 건네준 종이가방을 쥐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잠시만!”
일어나려는 나를 그녀가 막아섰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점을 보다보면 점을 보러 온 사람이 내 말을 믿는지, 의심하는지 대충 보이거든요? 솔직히 그쪽 분은 이런 거 안 믿는다고 얼굴에 쓰여 있어요.”
나는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네, 솔직히 안 믿는 편입니다.”
“제가 그쪽 점을 봐드릴게요. 어떻게 해야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는지”
그녀의 갑작스런 제안에 적잖이 놀랐다.
“오늘 밤 위험한가요?”
“제가 봤을 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합니다. 진짜로”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당장 오늘도 권 사장의 귀싸대기 한 방에 저승 구경을 했으니 말이다.
의심은 있었지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그녀의 말을 한 번 들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근데 저는 복채도 없는데”
“복채는 음~”
그녀는 뭔가 귀여운 표정으로 뜸을 들였다.
“복채는?”
“키스로 받을 게요”
그녀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키스요? 말씀하신 키스가 입맞춤 말하는 거죠?”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내 물음에 그녀는 고양이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귀여워보였다.
“진짜로 괜찮겠어요?”
나는 못 믿겠다는 투로 물었다.
갑자기 오늘 처음 만난 여자가, 그것도 무속인 여자가 키스를 하자니, 지어내기도 힘든 이야기였다.
“눈 감으세요”
나는 머뭇거리다가 흐름을 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을 감아서 그런지 모든 감각들이 곤두섰다.
부스럭부스럭 그녀가 일어나서 내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몸이 굳었다.
순간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는 게 느껴졌다.
코끝에는 그녀의 샴푸향인지 모를 벚꽃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몽롱한 기분에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지고 입 안으로 뭔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떨림과 한 손에 3000만원이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벚꽃마을 404호를 나섰다.
정신은 여전히 몽롱했다. 현관에서 나설 때 그녀는 내게 과일 깎던 과도를 건넸다.
“오늘 밤 꼭 이 칼을 품에 지니고 있어요.”
떨떠름했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 내 신변이 안전하지는 않았으니까.
칼을 받아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딱딱한 감촉이 가슴팍에 느껴졌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벚꽃마을 404호의 문을 나선 순간부터, 발걸음이 가벼웠다.
좀 전 계단을 올라올 때와 반대로, 계단을 내려가는 길이 BGM이 필요할 정도로 흥이 났다.
귀신 씌어 죽을 일도 없고, 빚도 사라질 거다.
아파트 입구에는 돼지감자군과 김 사장 패거리의 남자가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담배꽁초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네 그럭저럭”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이상한 일은 없었나요? 하도 안 나오셔서”
돼지감자군의 질문에 그녀와의 키스가 떠올랐지만 말을 아끼기로 했다.
“딱히 없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건 뭡니까?”
돼지감자군은 종이가방을 가리켰다.
“돈 받아왔습니다.”
“와! 정말입니까?”
돼지감자군의 표정이 오묘했다. 반대로 조수석 남자는 환하게 웃었다.
“일단 가시죠, 형님이 기다리십니다.”
다시 검은색 차에 탔다.
“그 여자가 뭐라고 안 합니까?”
돼지감자군이 차에 시동을 걸며 물었다.
“그 여자는 아무 것도 모르던데요?”
“뭘요?”
“그 민철이 형님이랑 상백이 형님이 죽었는지도 모르던데요?”
“진짜요?”
돼지감자군은 화들짝 놀랐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귀신 때문에 죽은 게 아닌 거네요?”
조수석의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그의 부담스런 반응에 고개만 끄덕였다.
“와 진짜, 뭔가 뒤통수 맞은 기분입니다.”
돼지감자군의 반응은 놀랍게도 그녀의 반응과 겹쳐졌다.
서로가 서로를 무서워했던, 당사자들은 몰랐던 아이러니한 상황.
깡패들을 무서워한 신 내림 받은 여자 그리고 신 내림 받은 여자를 무서워한 깡패들.
“와, 진짜 돈 벌기 쉽네,”
조수석의 남자가 혼잣말로 말했다.
“그러네요. 아, 이거 큰일 났네.”
돼지감자군이 차의 속도를 올리며 대답했다. 차는 가까스로 신호에 걸리지 않았다.
갑작스런 가속에 몸이 휘청거렸다.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귀신 없어서 아무 일도 안 생기면 빚 탕감 하는 거 아닙니까?”
조수석의 남자는 뒤에 있는 나를 의식하며 말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벚꽃 나무들이 즐비한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근데 아까랑 가는 길이 조금 달랐다.
앞의 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침을 삼켰다. 아까 흘렸던 코피 맛이 맴돌았다.
입안이 기분 나쁠 정도로 텁텁했다.
검은색 차는 공터에 도착했다.
나는 잔뜩 움츠려, 공포에 질린 상태로 차에서 내렸다.
“왜 이리 늦었어. 돼지감자 새끼야!”
“죄송합니다. 신호가 걸려서”
상철은 돼지감자를 밀치면서 다짜고짜 나를 김 사장과 권 사장 쪽으로 끌고 갔다.
“최형민씨가 드디어 왔네. 벚꽃마을 404호에 갔다 온 소감이나 들어볼까?”
권 사장은 겁에 질린 나를 보며 말했다.
“뭐야, 이 새끼 상태 왜 이래?”
순간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눈동자가 점점 올라가 흰자로 뒤덮였다.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를 잡고 있던 상철도 놀랐는지 바로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야 씨, 뭐야”
김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입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놈들 죽고 싶어?!!!”
공터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다름 아닌 내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경련을 일으키던 내 몸은 점점 앞으로 꺾였다.
“끄하하하하하하하!!”
배를 부둥켜 잡고 흐느끼며 웃었다. 미친 듯이 웃는 소리가 공터를 가득 메웠다.
김 사장도 권 사장도 기괴한 행동에 말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몇 초간 미친 듯이 웃다가 나는 대자로 공터 한 가운데 뻗었다.
몸이 살짝 들썩 거릴 때마다 깡패들도 움찔했다.
“씨발, 뭐냐 지금 이 새끼 귀신 씐 거야?”
김 사장은 놀랐는지 권 사장의 두꺼운 팔뚝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냐? 귀신 있다니까, 새끼야”
“미친 진짜였네, 씨발 나한테 귀신 붙는 거 아니냐?”
김 사장은 진심으로 스스로를 걱정하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귀신 있다고! 망할 벚꽃마을 404호에 진짜 귀신 있다니까!”
“아오!! 진짜면 큰일이잖아! 야!”
김 사장이 자신의 오른팔로 보이는 사람을 불렀다.
“내일 점집 알아봐 이거 재수 없어서 안 되겠다.”
“네 형님”
“내일 당장”
김 사장은 강조하며 다시 말했다.
“내가 뭐랬어. 귀신 있다니까! 상철아! 우리도 저번에 갔던 점집 내일 간다.”
“네 형님”
상철의 대답을 듣자마자 권 사장은 돌아가려는 김 사장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1억은? 귀신은 귀신이고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다음에 만나면 줄 테니까 기다려, 귀신 붙게 생겼는데 1억이 문제냐?”
김 사장은 패거리를 데리고 차에 탔다. 외제차는 부리나케 공터를 떠났다.
“야, 운전 조심히 해라, 강냉이 나간다.”
권 사장은 떠나는 차의 뒤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며 자신의 패거리를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민철이랑 상백이가 괜히 뒤진 게 아니라니까, 씨발 오늘 잠 다 잤네.”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숨은 붙어 있는데 제가 뒤처리 할까요?”
돼지감자군이 공터에 널브러져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 돼지감자야, 네가 좀 더 수고해야겠다. 저 놈 귀신 붙었을 테니까 잘 처리해, 사무실 오기 전에 소금 뿌리는 거 잊지 말고”
“네, 형님 뒤처리 하고 사무실로 가겠습니다.”
돼지감자군은 나를 들쳐 메고, 공터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 다가갔다. 그와 어울리지 않은 조그마한 빨간색 경차였다.
그리고는 뒷자리에 나를 실었다.
“돼지감자야 잘 처리하고 사무실로 와라, 수고해라”
상철의 말에 돼지감자는 꾸벅 인사했다. 뒷자리에 실린 나는 쥐죽은 듯 조용히 있었다.
돼지감자군의 빨간색 경차가 공터를 빠져 나가고, 차는 다시금 벚꽃마을 404호 쪽으로 향했다.
그는 뒷자리에 누워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최형민씨, 연기 죽이던데요?”
[30분 전]
돼지감자군은 가로수마저 듬성듬성 있는 외진 길가에 차를 세웠다.
옆에는 커다란 벚꽃 나무가 있었다.
“왜 여기에 차를 세운 겁니까?”
수상한 낌새를 느낀 나는 나도 모르게 종이가방을 몸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기 최형민씨”
돼지감자군과 조수석 남자가 동시에 돌아봤다.
“네?”
“옆에 상호 형님 하고는 이야기가 끝났는데”
조수석 남자의 이름이 상호인 모양이었다. 둘은 내가 벚꽃마을 404호에 있는 동안 뭔가를 꾸민 게 분명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 3000만원 우리가 먹읍시다.”
상호라는 사람이 말했다.
“네?”
돼지감자군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까 전까지 볼 수 없었던 굉장히 차가운 얼굴이었다. 마치 냉채족발처럼 보였다.
“어차피 최형민씨 오늘 죽을 거였어요. 저희 큰 형님이 최형민씨 돈 못 갚을 거라고 최형민씨 장기팔이한테 넘기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벚꽃마을 404호의 그녀가 내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밤 위험한가요?”
“제가 봤을 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합니다. 진짜로”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용한 점쟁이가 틀림없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일단 그 3000만원 중에 2000만원은 여기 벚꽃나무에 묻을 겁니다.”
“1000만원은요?”
“그 1000만원은 최형민씨를 장기팔이한테 넘긴 값으로 칠게요. 제가 최형민씨 뒤처리 맡을 게 분명하니까, 최형민씨를 장기팔이한테 넘기고 받은 1000만원이라고 하고, 저희 형님께 갖다 드릴 겁니다. 그리고 여기 묻어 놓은 2000만원은 저랑 여기 옆에 상호형님이랑 반씩 먹고요.”
내 몸뚱이가 1000만원에 팔린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자기들끼리 2000만원을 꿀꺽하겠다는 이야기에 한 번 더 놀랐다.
“저는요?”
나의 물음에 돼지감자군은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웃었다.
“최형민씨 몫은 없습니다. 대신 최형민씨는 목숨을 건지는 겁니다. 이렇게 안 하면 최형민씨 오늘 장기 털립니다?”
돼지감자군은 눈을 날카롭게 뜨며 말했다. 안 그래도 째진 눈이 더욱 사나워 보였다.
“잘~ 생각해요.”
상호라는 사람이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선택권은 없었다.
1000만원에 장기를 팔리는 것보다 귀신들린 연기 한 번 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나저나 상호라는 인간은 자신의 보스인 김 사장을 속이는 건데, 의리 없는 새끼.
“하겠습니다. 근데 의심받지 않을까요?”
“그건 걱정 마세요. 저희 큰형님 귀신이 있다고 완전 100% 믿고 있으니까, 아까 1억 거는 거 못 봤습니까?”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권 사장은 단단히 믿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희 같은 배 탔습니다. 믿겠습니다. 최형민씨 잘해야 돼요. 진짜”
“네”
대답을 하고서 뭔가 아닌 거 같아 크게 한숨을 쉬었다. 차는 다시 공터를 향해 출발했다.
돼지감자군은 신났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괜히 3000만원이 담긴 종이가방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나저나 돼지감자군은 내가 벚꽃마을 404호에서 무조건 돈을 받아올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최형민씨, 연기 죽이던데요?”
나는 눈을 떴다.
“이제 일어나셔도 됩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이제 괜찮은 건가요?”
“네, 이제 괜찮습니다. 근데 진짜 연기 잘하셨어요. 저희 큰 형님도 그렇고 다들 속더라고요. 완전 눈 뒤집고, 배우인줄 알았습니다.”
돼지감자군은 오른손으로 두툼한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지금은 어디 가는 거죠?”
“일단 아까 거기서 묻어 놓은 돈을 꺼내려고요.”
빨간색 경차가 커다란 벚꽃나무 옆에 섰다.
나와 돼지감자군은 차에서 내렸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돼지감자군은 치밀했다.
생긴 거와 다르게 지능형 캐릭터다.
아마 돼지감자군은 여기서 나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진짜 나를 장기팔이에게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나는 의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끝까지 확인했다.
벚꽃마을 404호와 관련된 죽음에는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었다.
단순한 사고사? 자살? 귀신에 의한 죽음? 앞서 언급된 가능성 말고 한 가지 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죽였다면?
바로 타살 가능성이다.
그리고 민철과 상백의 죽음에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람이 있다.
바로 돼지감자군.
[1시간 전, 벚꽃마을 404호]
“그 전에 왔던 사람들 죽었어요.”
덤덤한 투로 대답했다.
“네? 죽었다고요?”
“네”
“그 뚱뚱한 사람도요?”
돼지감자군을 말한 듯 했다.
“아뇨, 그 사람은 안 죽었어요.”
“그 사람이 제일 자주 와서 돈 받아갔는데, 그 전에 오신 분들은 다 죽었다고요?”
“모르셨나 봐요?”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이상했다. 돼지감자군은 분명히 민철이라는 사람과 한 번 와봤다고 했다.
그리고 권 사장을 비롯한 그쪽 조직원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근데 돼지감자군이 자주 와서 돈을 받아갔다고?
권 사장이 벚꽃마을 404호에 가서 돈을 받아오라고 할 정도로 돈을 못 받았었는데?
이후 내 머리는 급속도로 굴러가며 한 가지 가능성을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귀신으로 인한 죽음이 돼지감자군이 꾸민 일이라면?
벚꽃마을 404호에서 지속적으로 돈을 받으며, 그 사실에 접근 못하게 하려고, 조직내부에 벚꽃마을 404호 귀신 소문을 퍼뜨렸다면?
돼지감자군은 상백의 교통사고를 통해 퍼진 귀신의 존재 가능성을 확대 시켜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민철과 상백의 죽음으로 더욱 귀신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벚꽃마을 404호에서 권 사장 몰래 돈을 받으며 지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벚꽃마을 404호에 나를 보내는 권 사장과 김 사장의 내기는 심각한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귀신이 없다는 사실이 탄로 날 가능성과 더불어, 그곳에서 돈까지 받아오면 더욱 꼬이는 게 분명할 터였다.
그럴싸한 가능성이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돼지감자군이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민철의 팔뚝에 인슐린 주사를 놓는 모습이 그려졌다.
옥상에서 담배를 피던 상백을 밀어서 떨어뜨리는 돼지감자군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지만 이것은 어떤 가능성보다 정답에 가까웠다.
나는 외투 안쪽에서 그 여자에게 받은 칼을 꺼냈다.
그리고 돈을 꺼내려고 땅을 파던 돼지감자군을 찔렀다.
돼지감자군은 쿨럭 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수차례 그의 등을 마구 찔렀다. 돼지감자군의 등은 피와 땀에 젖어 축축해졌다.
살인을 저질렀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돼지감자군이 나를 죽였을 것이다.
올라오는 역한 피비린내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우웩!”
돼지감자군의 등에 토를 쏟아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토사물에는 돌돌말린 종이가 있었다.
불길함을 느낀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끄집어냈다.
돌돌말린 종이를 조금씩 펼쳤다.
부적이었다.
‘뭐지?’
의문과 함께 그녀와의 키스가 떠올랐다.
몽롱한 기분에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지고 입 안으로 뭔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었다.
그건 혀가 아니었다.
이질적인 느낌에 눈을 떴고, 키스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고,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 정신이 희미해져갔다.
옅어져 가는 의식 속에 벚꽃마을 404호 베란다 창가에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그 때 어머니의 다리를 봤다.
다리가 없었나? 아니 떠있었나?
차갑게 식어가는 돼지감자군의 거대한 등 위에 벚꽃 잎이 떨어졌다.
정말로 내가 귀신에 홀렸나?
언제부터였지?
악몽의 시작을 알리는 권 사장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벚꽃 마을 404호에서 돈 받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