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역할놀이 1 - 4

꿈에서 깨어나니 눈 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몽롱하다.


아직 술 기운이 남아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 거린다.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침대 끝자락에 걸터 앉았다.

눈꺼풀이 무거워 눈이 떠지질 않아 그대로 눈을 감고

평소에 하던 대로 컴퓨터 본체가 있을만한 부근에

슬며시 발가락을 댔다.


술 기운 탓인지 평상시와 다르게 쉽게 본체에 발가락이 닿지 않았다.

'원래 이쯤에 파워 버튼이 있는데..'


잘못 갖다댔나 싶어 발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컴퓨터는 커녕 책상에도 발가락이 닿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처음 보는 곳 이었다.


'여긴 내 방이 아닌데?어제 친구들이 나를 여관에 옮겨놨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았다.

손에는 500원 짜리 하나가 잡혔다.

뒷주머니까지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았지만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이 어디갔지?어라?지갑도?'


불현 듯 예전에 9시 뉴스에서 보았던 아리랑치기가 떠올랐다.

재빨리 신고를 하기 위해 방문을 열고

여관 주인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여관의 중앙에는 할아버지와 교복을 입고 있는 남학생

그리고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 하나가 있었다.


"7번째 사람인가?이제 한사람.."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중얼거린 말이 거슬려 자세히 들으려 했지만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염아저씨 때문에

나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세요."


수염아저씨는 내 물음에 답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느 새 수염아저씨는 내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고

나는 너무 놀라 수염아저씨의 복부를 발로 찼다.


"저리 꺼져!!"


내 발차기 한방에 나가 떨어진 수염아저씨는

배를 움켜쥐며 나를 노려봤다.

나 역시 물러날 기분이 아니었기에 똑같이 노려보았다.


순간 할아버지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이보게,너무 성급하지 않은가..아무런 설명 없이 다가가면 안돼지..

그리고 젊은이도 어른을 그렇게 발로 차면 쓰나..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니 진정 좀 하게나.

그나저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자네의 상의 좀 걷을 수 있을까?"


"무슨 말이죠?"


"자네도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렇다네.

이해좀 해주게."


할아버지의 차분한 말투 때문인지

금세 진정된 나는 할아버지의 부탁대로 상의를 위로 올렸다.

상의를 걷자 내 가슴팍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심장 쪽에 이상한 기계가 부착되어 있었다.


"자네도 우리랑 같은 처지로군."


"나도 그렇고 저 수염이 난 사내도,저기 학생도

그리고 젊은이 자네도 모두 이 곳에 갇힌 거야,그녀석한테.

그 녀석은 우리에게 이상한 걸 요구하지.

우리를 죽일 수 도있네.

저기 복도 끝에 있는 철문이 유일하게 나갈 수 있는 문으로 보이나

굳게 닫혀 있어 열수 없네.

한마디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네."


"그 녀석이 누군데요?그리고 이거 떼어도 상관 없죠?"


내가 가슴에 붙어있는 기계를 떼어내려고 손을 갖다대려 하자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안 돼!!젊은이,억지로 떼려하면 죽을 수 도 있어."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할아버지를 쳐다 봤다.


"그걸 억지로 떼려하면 그 녀석이 아저씨를 죽일거야."


옆에 가만히 있던 학생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이런..~학생?그 녀석 이라뇨.나한테는 조카뻘인데 녀석이라니,

너무 속상하네요.]


어디서 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듣기 거북한 변조 된 음성이 들려 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관 곳곳에 설치 된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니,이곳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여관이 아니었다.


나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의 정체가 누군지 궁금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지금 말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에요?

그리고 지금은 뭘 하는 상황이죠?"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다네..

다만 중요한 건 우리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거지."


할아버지는 말씀을 하고 선 한숨을 내 쉬었다.


[에?..~할아버지 목숨이 뭐가 위험해요..~

아까도 말씀 드렸잖아요.그새 까먹으셨나?아니면 혹시 치매?

이건 그냥 역할놀이 일 뿐 이에요.

각자 방 문 안쪽에 붙어 있는 종이에 적힌 것이

바로 자기가 해야하는 역할이죠.

자세한건 그 종이에 모두 쓰여 있고요..]


"아니,그 종이는 이미 10번도 넘게 읽었네."


모두 처음 듣는 소리라 나에게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난 방에서 그런 종이 못봤는데?"


[이런..~너무 빨리 나와서 못 봤나보네요,다시 가 보세요.]


나는 상황을 조금 더 차분하게 생각하기 위해

내가 있던 방으로 돌아 갔다.

방의 안 쪽 문에는 정말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역할놀이 -


*당신의 역할은 ???입니다.모두를 ??? 해주세요.

*규칙도 있습니다.

-제한시간은 4일,역할놀이에 필요한 인원은 총 8명.

-자신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되도록 비밀입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제대로 안하면 가슴에 달린 폭탄이 펑!

-멋대로 폭탄을 뜯어내려 해도 펑!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 없습니다.

-4일동안 역할을 멋지게 수행하시면 살려 드립니다.

-다른 사람들과비교 했을 때,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역할놀이를 못하신 분들은 역할놀이를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시작!


'뭐야 이건..'


나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어느정도 상황을 알고나니,아까보다는 진정 되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마침 내 방의 반대편 방 에서 어떤 여자가 나왔다.


[짝!!]


그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부모님도 건드리신 적이 없는

나의 뺨을 때렸다.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붉어진 뺨을 손으로 비비며 나를 때린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네 짓이니?이 변태자식아!지금 장난해?여긴 어디야?"


내가 이렇게 아무 저항도 못하고 있을 때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다가와서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모자 쓴 남자의 뒤를 이어 팔에 문신이 가득 한 건장한 남자와

정장차림의 아줌마가 뒤 따라 왔다.


"너희들은 뭐야?너희도 한패야?너희 콩밥 먹고싶니?"


여자는 모두에게 소리를 지르고 팔을 거세게 흔들며 저항 했지만

모자를 쓴 남자의 힘에 꼼짝 못하였다.


"저기요,저희가 아무래도 같은 처지인 것 같은데..그만 하시죠."


모자를 쓴 남자는 침착하게 여자를 타 일렀다.


"그래요 아가씨,좀 진정 하세요."


얼떨결에 뺨을 맞은 나 였지만 나 역시 그 여자보다는

지금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있던 터라

침착하게 여자를 진정 시켰다.


[오호..~드디어 8명이 모두 모였네요.]


또 다시 역겨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 나왔다.

그리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목소리가 나오는 천장 위를 바라 보았다.


[여러분?일단 복도 중앙 넓은 곳으로 나오세요.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원탁에 빙 둘러 앉아 제 얘기좀 경청하세요.]


"이건 또 뭐야?"


역시나 그 여자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불쾌한 소리에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주변 사람들의 분위기와 무력에 눌려

순순히 그 녀석의 지시대로 행동 했다.


스피커에서 나온 말 대로 복도 중앙은 다른 복도와는 달리

공간이 넓었고,그 가운데에 정확히

여덟개의 의자가 놓여있는 원탁이 있었다.

그리고 복도의 네 귀퉁이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고

그곳에는 붉은 불빛들이 반짝였다.카메라가 있는게 분명했다.


"다 모였는데 이제 어떡해야 하나."


할아버지가 먼저 천장의 스피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자리에 앉으셨군요,일단 문 앞의 종이는 모두 보셨죠?

제가 정성껏 만들었는데 당연히 보셔야죠,후후

우선은 서로 같이 역할극을 할 건데 누가 누군지 알아야겠죠?

자기소개를 하시죠,서로들 모르잖아요?]


그 녀석의 말을 듣고 모두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일이다.

처음보는 사람들,그리고 낯선 장소,불쾌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자기소개라니,참으로 어이없는 요구다.


'기분 나쁜녀석,네 소개나 하시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녀석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자기소개를 해 댔다.


[이런이런..~쑥스러워 하시기는..그럼 사교성 있는 저부터 하죠.

저는 여러분을 가둬 놓은 납치범이자

여러분의 몸속에 폭탄을 심어놓은 폭탄 테러범이자

역할극을 꾸민 감독이자

이제부터 여러분의 연극을 보게 될 관객이라고 합니다.후후후~]


녀석은 흥에 겨워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굳이 설명 할 필요가 없는 우리에게 저지른 악행을

마치 자랑하듯 떠벌리는게 영 못마땅 했다.


"저 말투봐라?너 이 잡히기만 해,쥐 같은 놈!"


팔에 가득하 문신,쩍 벌어진 어깨,딱 조폭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탁자를 치며 소리 쳤다.


"본인 소개나 하시죠,괜히 도발하지말고 일단 저 분의 말을 따릅시다.

당신들이 일어나기 전에 저도 몇번이나 대화를 시도 했지만

저 분하고는 대화가 안되네요.

저 분의 요구를 들어 준다면 저분도 우리를 밖으로 보내 주겠죠."


정장차림의 아주머니가 안경을 고쳐 쓰며 조심스레 한 마디 했다.

아주머니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미묘하게 떨리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 꽤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는게

아마도 이 낯선 상황에 꽤 적응 된 것으로 보였다.

거칠게 말 하던 아저씨도 아주머니의 말에 조금 기가 눌린 듯 했다.


"큼..저 때문에 흥분해서 죄송했습니다.

아주머니 그럼 저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뭐냐,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 있는 강남에서 아주 잘나가는

빡구파의 고위간부 쌍용이라고 합니다.이 상용."


상용 아저씨는 자신의 셔츠를 걷어

양쪽 팔뚝에서 승천하는 용 두마리 쌍용을 보여주며 말했다.

꽤나 힘을 과시하는 타입으로 보였다.

아니,확실히 남에게 힘을 과시하는 타입이다.


"그 다음은 제가 소개 할게요,저는 대학생으로.."


"대학?어디?무슨 대학?"


상용 아저씨는 모자 쓴 남자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끼어 들며 질문을 했다.


"네,서울대 다니고 있습니다."


모자 쓴 남자는 상용아저씨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쳇-지금 확인 못한다고 둘러대기는.."


상용아저씨는 모자 쓴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상용아저씨의 시비에도 모자 쓴 남자는 표정변화 없이

침착함을 유지했다.


내 생각엔 둘 중 하나다.

상용 아저씨에게 겁을 먹었다거나,진짜로 서울대가 아니거나.


모자 쓴 남자의 소개가 끝나고 5초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그대로 놔두면 침묵이 길어질 것 같아 내가 소개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그동안 조용히 말 한마디 없던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 다음은 제가 소개해도 될 까요?"


학생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모두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예..저는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고요,이름은..꼭 말해야 하나요?

어짜피 모르는 사람들인데.."


가방끈을 양 손으로 꼭 붙잡은 채

주늑들어 자기소개 하는 걸 보니 내가 다 안쓰러웠다.


게다가 학생의 이름은 이미 명찰을 보고 알고 있었다.

안 세 형.


그런데 그렇게 굳어있는 세형학생에게

상용 아저씨는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넌 남자가 어깨 좀 피고,너 이 학교에서 맞고 다니지?

내가 학교 다닐때,너 같이 기생오라비 같은 애들이 제일 싫었어."


상용아저씨의 질책에 세형학생은 울먹였다.


[상용씨?제가 써준 역할대로 행동하세요.괜히 나대지 말고.]


스피커에서 처음으로 옳은 소리가 나왔다.

스피커의 소리는 빡구파의 쌍용이라는 닉네임에 쫄아서

한마디도 못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뻥 뚫어 주었다.


상용아저씨도 갑작스런 지적에 당황해 하다가

이내 천장의 스피커를 행해 욕을 해댔다.


"뭐라고?이 가 보자보자 하니까!거기 숨어있지 말고 나와!"


[상용씨,역할대로 행동하시죠?마지막 경고 입니다.]


조금 더 냉랭해진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왔다.

모두가 목소리의 분위기가 바뀐 걸 눈치 챘지만

상용 아저씨만은 더욱 흥분해 소리치기 바빴다.


"나오라고 이야!!"


[펑!!]


기계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던 상용 아저씨의 입에서

육두문자 대신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사방에 흩어졌다.


입에서 피를 토해내던 상용아저씨는

그의 육중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철푸덕'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고꾸라 졌다.


"꺄악!!!"

"으악!!!"


내 옆에 앉아있던 여자는

자신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자 비명을 질러댔고

세형학생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역할을 제대로 했어야지.

서울대를 나왔다는 모자 쓰신 분,

힘들겠지만 상용씨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종이를 꺼내

그의 역할이 뭔지 확인 해 주세요.

그가 얼마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는지 모두가 알아야죠.]


스피커는 지시를 했고

스피커의 지시에 따라 모자를 쓴 남자는

천천히 상용아저씨의 시체에 다가가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에서는 구겨진 종이가 나왔고

모자를 쓴 남자는 그 종이를 펼쳐서 보더니 나에게 건냈다.


나는 당황한 와중에 종이를 건네 받았고,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의 역할은 '겁쟁이' 입니다.모든것을 두려워 해 주세요.]


애초에 상용아저씨가 소화하기에는 불안한 역할로 보였다.


'저런 건달에게 겁쟁이라니..'


이윽고 사람들이 상용아저씨의 종이를 돌려보자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상용씨의 역할은 '겁쟁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겁쟁이처럼 행동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여러분들도 공감 할 겁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역할극이라도 좋으니 사회에서 힘 좀 쓰는 사람이 겁먹는 모습을

꼭 보고싶었는데..어찌됬든

이제 다들 자기가 맡은 역할의 중요성은 알겠죠?

뭐,역할의 중요성은 상용씨 하나로 깨우쳤으면 좋겠네요.후후후]


절반 이상이 패닉상태인 채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모자를 쓴 사내는 고개를 숙여

피가 번지고 있는 바닥을 응시한 채 멍하니 있었고

옆에 여자는 엎드린 채 울고 있다.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는

황급히 상용아저씨의 시체가 나뒹구는 자리를 떠났고

수염아저씨는 학생이 걱정되는지 학생의 방 문을 두드렸다.


모두들 진짜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감지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 깨달았다.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은 중요하다고.

이제부터 목숨을 걸고 역할극을 해야 한다고.


나 또한 그렇다,이제부터 내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상용아저씨가 본보기로 죽은 후

모두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았다.


나 역시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 보았다.

변조 된 목소리로 나를 괴롭히던

천장 위의 스피커 역시 상용아저씨가 죽은 후로 잠잠했다.


그 녀석은 상용 아저씨를 죽일 때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 이유 또한 별것도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역할놀이 덕분에 두려움과 분노에 몸이 떨려서

억지로 잠들려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나서 '악몽을 꿨네.'라며 그냥 훌훌 털고 일어나서

평소처럼 대충 아침 겸 점심으로

계란 하나 탁 깨뜨려 넣은 라면 하나를 끓여서

먹고남은 국물은 찬밥에 말아 먹은 다음 해가 질때까지

계속 컴퓨터를 하다 친구들에게 전화해

밤에 모여 소주한잔 하면 좋으련만..


무심코 손목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종이에 제한시간이 4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4일 후,역할을 잘 하면 집에 보내 주려나?'


[똑똑똑]


누군가의 노크소리에 감고 있던 눈이 떠졌다.

나도 모르게 잠깐 졸아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졸다니..나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2시정도 됐겠지?'라고 생각하며 손목시계를 보니 8시였다.

졸았던 게 아니라 마음 놓고 푹 잔 것이었다,난 정말 대단하다.


[똑똑똑]


계속되는 노크소리에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문고리를 쥔 순간,이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문의 옆의 벽에 기대어 말 했다.


"누구세요?"


함부로 문을 열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신중하게 행동했다.


"아,저는 어제 서울대 다닌다고 소개한 사람 입니다."


"근데 무슨 일로?.."


"할아버지 기억나시죠?할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다들 불렀거든요..지금 모두 모이고 그쪽만 남았는데."


나는 혹시나 해서 쥐 한 마리 들어올 정도로 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 봤다.


모자를 쓴 남자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보였다.

나는 머쓱해서 산발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열고 나왔다.


바깥 통로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할아버지는 내게 복도 중앙에 번져있는 피를 눈으로 가리키며

대충 눈치를 줬다.


순간적으로 복도 중앙에

상용아저씨의 시체가 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체가 있는 곳에서 대화를 하기에는

다들 심장이 약한 모양 이었다.


"하실 말씀이 도대체 뭐죠?"


모자를 쓴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흠.."


할아버지는 헛 기침을 한번 하시더니 주위를 둘러보곤 말을 이으셨다.


"아무래도 우리가 서로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불렀습니다.

우리가 여기 잡혀 온 이유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에헴.."


할아버지는 말씀을 하시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셨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도 정말 용기를 내서 하신 말씀일 것이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서로가 서로를 알고,신뢰하고

힘을 합치면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 나름인지라..


"서로의 무엇을 알자는 거죠?"


정장 차림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에..그러니까 뭐..자세한 건 아니더라도.."


할아버지는 아주머니의 비협조적인 말투에

당황 하셨는지 말을 더듬으셨다.


"최 재희 라고 합니다.어제 말했다시피 대학생입니다.

그리고 이름정도는 서로 알아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자신의 역할까지는 무리더라도."


모자를 쓴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흠..이런 말을 하기는 뭐 하지만 꽤 멋있게 말 했다.


역할의 비공개 또한 좋은 생각 이었다.

아무래도 규칙에 쓰여 있던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 없습니다.


종이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역할을 함부로 말 할리가 없었다.


재희씨는 말을 마치고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제가 소개를 먼저 했어야 했는데..저는 권 태식이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할아버지라고 불러 주십시오..에헴.."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자신을 소개 했다.


"저는 김 수정이에요.그리고 아저씨,저번에 때린 거 미안해요."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 여자는 불쑥 자신의 이름을 말 하더니

이내 나를 보며 저번에 나의 따귀를 대린 것을 사과했다.

하지만 건성으로 사과를 한 것인지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보고 아저씨라니..하여튼 요즘 여자들은..


"저는 우 소형이라고 합니다.그리고 아저씨가 아닙니다."


나는 소개를 하면서 내가 정말 소인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저씨가 아니라는 말을 수정이라는 여자를 보며 해댔으니..


"저는 안 세형입니다.고등학생 이고요."


특유의 비브라토 섞인 소리로 세형학생이 소개를 했다.

뭐,이름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진정이 됐는지

목소리의 떨림이 덜하다.


이제 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은 두명.

차분한 아주머니와 말 한마디 없는 수염 아저씨.


모두가 그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자

아주머니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미숙이라고 합니다.그냥 정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정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고 모두 수염아저씨를 바라 보았다.

하지만 수염아저씨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말도 없었다.


그리고 손으로 X자 표시를 하며 입에 댔다.

그러고 보니,저 수염아저씨가 말 하는 걸 보지 못했다.


"말을 못하시나?"


재희씨가 떠 보는 듯이 말하자 수염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는 허공에 손을 휘둘러 댔다.


"여기 수화 할 줄 아는 분 있나요?

저 아저씨가 수화로 말 하시는데 통역 좀 해주세요."


재희씨는 수염 아저씨의 수화를 알아보려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모르는데요."


다들 고개를 저었다,나 또한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수화를 할 줄 안다.

대학교 다닐 때,봉사활동을 다니며 많이 배웠고

덕분에 간단한 의사소통은 다 할 줄 안다.


하지만 내가 수화를 해 봤자 수염아저씨는 못 알아 볼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저 아저씨가 하고 있는 손짓은 모두 엉터리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 아저씨는 실제로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 역할은 벙어리 일테지.

당분간 이 사실은 나만 아는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거기 가방에 필기구 있지?"


"네."


"그러면 그걸로 의사소통 하면 되겠네."


세형학생은 재희씨의 말대로 종이와 펜을 꺼냈고

재희씨는 그것을 수염아저씨에게 주었다.

수염 아저씨는 펜을 가지고 무언가를 썼다.


'박 만도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그렇게 각자의 소개가 마무리 지었다.

대충 뭔가 마무리 지어지니 잊고있던 허기가 느껴져 배가 고파졌다.

여기 온 후로는 물도 못 마시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나는 주위를 살피다가 가장 친절해 보이는 재희씨에게 물었다.


"혹시..식사는 하셨나요?저는 출출하네요.."


나의 분위기를 확 깨는 질문에

재희씨는 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귓속말로 말 해주었다.


"방에 보면 구석에 냉장고가 있을 거에요,거기에 음식들이 있는데

역할극이 끝나는 4일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에요."


"아..그렇군요,고맙습니다."


재희씨의 역할은 혹시 천사 일까?

남자한테까지 친절한 남자는 보기 드문데 정말 존경스러웠다.


재희씨의 말을 듣고 허기 진 배를 채우려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반대편 방을 쓰는 수정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소형씨라고 했죠?궁금해서 그러는데,여기선 굶어야 하나요?

음식은 어떻게 해결하죠?"


"모르겠는데요."


나는 그렇게 말 하고는 문을 닫고 냉장고를 찾았다.

방의 구석에는 재희씨의 말 대로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냉장고에는 물과 빵,그리고 초콜릿 등이 있었다.

나는 빵과 물을 집어 침대에 앉아서 먹었다.


간소했지만 배고픈 내 배에게는 최고의 음식 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는 우리가 하고 있는 역할놀이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역할은 ???.

그리고 수염아저씨,아니 만도 아저씨의 역할은 벙어리.

나와 만도 아저씨가 맡은 역할은 모르겠지만

세형학생,재희씨,수정씨,할아버지,정선생님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세형학생은 겁이 많은 것 같고,재희씨는 착하다.

할아버지는 그저 할아버지일 뿐이고,

정선생님은 조금 깐깐하지만 뭐,위험해 보이지는 않고..

수정씨는 조금 위험하지만 뭐 여자니까..


우리를 가둬놓은 녀석의 말대로 역할만 제대로 수행 한다면

그렇게까지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나가자

반대편에 수정씨가 빵을 손가락으로 뜯어먹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눈을 마주치기가 겁나 그냥 무시하고

재희씨와 할아버지,그리고 정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갔다.


셋은 모여서 뭔가 대화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어떻게하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이곳이 꽤 따듯 한데도 아직 정장을 제대로 갖춰입은

정 선생님을 보며 물었다.


"덥지 않으세요?전 더워서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데."


"제 마음이니까 상관하지 마세요."


나는 날카로운 반응에 움찔했다.뭐,어느정도 깐깐한 건 알았지만..

같이 대화를 하던 할아버지와 재희씨도

정 선생님의 갑작스런 정색에 꽤 놀란 눈치였다.


"전 이만 방으로 가 보겠습니다."


정 선생님은 그렇게 말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민망함에 눈치를 보다가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괜히 짜증이나 내고,잠이나 자야겠군.'


나는 찝찝한 마음을 안고 잠을 청했다.

생각했 던 것보단 안전하다고 느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첫 날보다는 편안했다.


생각해보니 벌써 이틀 째,

오늘은 그 녀석의 목소리도 하루종일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잠이 잘 왔다.


[털썩,뚜벅뚜벅,또각또각]


잠 귀가 밝은 탓에 밖에서 나는 괴상한 소리에 눈이 떠졌다.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나 말고도 재희씨,정 선생님이 통로에 나와서 숨죽이고

복도 중앙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재희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모르겠어요,복도 중앙 쪽에 뭔가 있어요."


재희씨는 그렇게 말 하고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는

서서히 복도 중앙 쪽으로 다가갔다.

나 역시 재희씨를 따라갔다.

그리고 내 뒤를 정 선생님이 따랐다.


재희씨는 눈치를 보다가 순간적으로 뛰쳐 나갔다.

나 역시 재희씨의 뒤를 따라 나갔다.

복도 중앙의 구석에 뭔가 보였다.


"누구시죠?"


재희씨가 구석에 있는 그것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것이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세형학생 이었다.

하지만 그 광경이 가히 호러 스러웠다.


바닥에는 누군가의 팔과 다리가 잘려져 널브러 져 있었고

피로 물든 교복 와이셔츠를 입은 세형학생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이 들려 있었다.

무엇보다 끔찍했던 건 세형 학생의 울고있는 모습 이었다.


"아니에요..난.."


세형학생이 우리에게 다가오며 중얼 거렸다.

나는 너무 놀라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뒤에 있던 정 선생님이 정장마이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탕!]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던 세형학생은 털썩 쓰러졌다.

재희씨가 황급히 손에 권총을 든 정 선생님의 손을 붙잡았지만

이미 방아쇠가 당겨진 후 였다.


총알은 애석하게도 세형학생의 이마에 명중했고

세형학생은 비명 한마디 없이 즉사했다.


순간적으로 이마에 구멍이 뻥 뚫린채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는

세형학생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고,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날..죽이려고 했어.."


정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세형학생을 죽이고 이성을 잃은 듯보였다.


"소형씨,좀 도와주세요."


정 선생님의 권총을 뺏으려는 재희씨는 힘이 부치는 지

내게 도움을 요청 했다.


"예?아..네."


도와준다고 대답은 했지만 난 주저 앉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아도 곧 총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할아버지와 만도 아저씨가 대충 눈치를 채고 재희씨를 도와

이성을 잃은 정 선생님을 뒤에서 붙잡았고,

그 틈에 재희씨가 권총을 정 선생님의손에서 빼내었다.


그리고는 총구를 정 선생님의 이마에 겨누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됐다.


"권총을 이리 줘,내꺼야."


정 선생님은 만도 아저씨에게 붙잡힌 채

자신을 겨누는 재희씨를 올려다 보며 소리쳤다.


"왜 세형학생에게총을 쐈죠?"


재희씨는 비교적 침착함을 유지하며 정 선생님에게 물었다.


"날 죽이려 했어..손에 칼을 쥐고 있었어!!"


정 선생님은 악을 써댔다.


"울고 있었어요!!칼도 손에서 버리려 했고!"


재희씨의 말이 옳았다.

나 역시도 세형학생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 많이 놀라긴 했지만

뭐랄까..그다지 위험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정 선생님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총을 쐈다.

우리들 중에 가장 안전한 맨 뒤에 있었으면서.


"왜 죽였냐고요!!그리고 권총은 어디서 났죠?"


재희씨는 다시금 물었다.

권총을 손에 쥔 채 부르르 떨면서..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재희씨가 총을 쏠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있는 재희씨는 남에게 총을 쏠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지금 총을 쏜다면 뒤에서 정 선생님을 붙잡고 있는

만도 아저씨도 총에 맞을게 분명했다.


재희씨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재희씨가 이렇게까지 정선생님을 추궁하는 이유는?


'아마도 권총까지 가지고 있는 정 선생님이

맡은 역할을 알아보기 위해서겠지.'


"그게 내 역할이니까!!그래서 총을 쐈어."


정 선생님이 울면서 주저 앉았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재희씨의 추궁에 정 선생님은

자신의 역할이었음을 실토해냈다.


뭐,처음보는 학생의 목숨보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역할이

더 소중한 것은 당연한 거니까.


그렇다고 '그냥 죽이고 싶어서 쐈어'라고 할 수도 없고..

이로써 내가 생각했던 안전한 역할 놀이는 끝이 났다.


[하하!드디어 여러분들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시네요.

관객으로써 지루했던 참인데 이제야 보기 좋네요.

팝콘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네요.후후~]


오랫만에 스피커에서 그 녀석의 변조 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눈 앞에 그 녀석이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렸겠지만,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 녀석의 짖궂은 웃음소리를 듣는 것 밖에 없었다.


[우 소형씨.]


스피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나는 엉겁결에 대답을 했다.


[방금전에 죽은 학생의 역할이 뭐 였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학생의 방에 들어가 가방앞쪽의 포켓을 열어보세요.]


나는 스피커의 소리를 듣고선 그냥 천장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 내게 재희씨가 말했다.


"제가 가볼게요."


재희씨는 천천히 세형학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방 문을 열고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당신의 역할은 '시체처리반'입니다.

시체가 생기면 칼로 썰어서 중앙복도의 구석에 있는

수거함에 넣어 주세요,칼은 침대 밑에 있습니다.]


"학생은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았어요,그건 느낌으로도 알수 있죠.

내가 조금만 빨리 움직였어도..구할 수 있었을 텐데.."


재희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도 만도 아저씨도,할아버지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이대로 있어봤자 우리는 모두 죽을 거에요.

아무도 지키지 못하고.."


재희씨는 그렇게 말 하고는 세형학생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너무 순식간이라 말리려 했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탕!]


문 밖으로 단발의 총성이 새어 나왔다.

모두들 놀라서 움직일 수 없었다.


총소리가 복도에서 울리다가 사라지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아무도 방 안을 확인하지 못했다.


2분정도 지났을까?

나는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의 중앙에는 재희씨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재희씨..이 방법밖에 없었나요?'


나는 조용히 다가가 재희씨가 떨어뜨린 권총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문을 닫았다.


"어떻게 됐는가?"


할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재희씨는 자살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만도아저씨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정 선생님은 벽을 짚고 일어섰다.

저 사람 때문에 무고한 사랑ㅁ이 둘이나 죽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은 내가 죽이겠어."


나는 권총으로 정 선생님을 겨눴다.

하지만 나는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정 선생님은 그런 나를 담담히 보다가 내가 들고있는 권총을

손으로 쳐 냈다.

총은 쇳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총알은 2알 밖에 없었어,자살도 죽은 건 죽은건데 뭐."


정 선생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벽을 짚고 힘겹게 걸어갔다.

나는 더욱 화가 났고,

만도 아저씨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정 선생님에게 달려드는

나를 막아섰다.


"내 역할은 이제 끝났어.."


정 선생님은 그렇게 말 하고는 자신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가려했다.

정 선생님이 방 문을 열자 방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며

정 선생님을 반대편 벽으로 밀어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수정씨 였다.

수정씨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고 그 칼은 정확히

정 선생님의 배에 꽃혔다.


수정씨는 칼에 맞고 고통스러워 하는 정 선생님의 귀에 대고

다 들리게 끔 말 했다.


"왜 웃고 있는거야?죽어버려!"


정 선생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수정시는 그런 정 선생님을 아랑곳 하지 않고

칼로 배를 더욱 깊이 쑤셨다.


[펑!]


순간 기계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고,

칼로 배를 찌르던 수정씨의 얼굴에 정 선생님이 피를 토해냈다.

피로 범벅이 된 수정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나는 혹시 수정씨도 죽었나 하고 얼른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그녀는 기절 한 것 뿐이었다.


나는 상의를 벗어그녀의 얼굴에 잔득 묻은 피를

어느정도 닦아내었다.


순간 스피커에서 그 녀석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하!뜸을 들였던 만큼 모두가 화끈하게 보여주는 군요?

제가 원했던 거에요,특히 젊은 아가씨,참 대단하군요!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하하하!]


그 녀석은 우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이 마냥 즐거운 모양 이었다.

결국 모든 상황이 놈이 바라던 대로 됐고

우리는 꼭두각시처럼 조종 당했다.


"하하?지금 감탄이 나와?아무이유 없이 사람들이 개죽임 당했는데

고작 네 녀석이 엉성하게 짜 놓은 역할놀이 때문에!!"


나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이런이런..~진정하세요 소형씨,그나저나 궁금하지 않으세요?

총을 들고있던 아주머니의 역할,궁금하시다면

아주머니가 입고있는 상의의 안주머니를 보세요.]


나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천장을 한 번 보고

천천히 정 선생님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결코 그 녀석의 지시를 따르는 게 아니다.

나는 그 녀석이 지시를 하지 않았어도 그녀의 역할을 확인했을 것.

정 선생님의 역할이 너무 궁금했다.


그녀의 몸은 피와 살점으로 뒤덮혀 어떤게 옷이고,어떤게 가죽인지

도저히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헤집다가 겨우 마이의 안 주머니에서

빨갛게 물 든 종이를 찾아냈다.

피가 묻어있었지만 충분히 글씨는 알아 볼 수 있었다.


[당신의 역할은 '총잡이'입니다.총으로 두 사람을 죽이세요.

총알은 두 발이며,본인을 쏴도 상관은 없답니다.

총과 총알은 냉장고 안에 있습니다.]


[아주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어요,총잡이 빵야!후후~]


"중요해?이런!역할놀이는 개뿔!"


나는 종이를 구겨서 바닥에 내팽겨 쳤다.

결국 처음부터 정 선생님은 누군가를 꼭 죽여야만 했다.


그래야 정 선생님이 살아 남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타겟이 내가 될 수도 있었다.


'잠깐..내가 죽을 수도 있었어?'


죽을 수도 있었다라는 생각에 이마에 식은 땀이 흘렀다.

땀을 닦아내려다가 피로 붉게 물든 손을 보고 잠시 멈추었다.


기분이 더러워서 피가 묻은 손을 연신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바지는 더러워져도 상관없었다.

그저,내 손에 피가 묻었다는게 너무 싫었다.

피를 어느정도 닦아내고

패닉상태에 빠져 멍하니 앉아있는 만도 아저씨와

기도를 하시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계신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가씨는 살아 있나?"


할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내게 말했다.


"네,기절 한 거에요.조금 있으면 일어날거에요."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이제 아무도 죽지 않겠죠?'


만도아저씨가 내게 종이를 건냈다.


"이제는 아무도,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말을 하면서도 힘으 쭉 빠졌다.


"저 아가씨,기절했다고 했지?역할을 확인해 두는게 좋지 않을까?"


조금 찝찝했지만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그녀 역시 우리의 눈 앞에서 정 선생님을 죽였기에

그녀의 역할을 알아 볼 필요가 있었다.


"네,그럼 제가.."


일어서려고 하자 할아버지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아냐,아냐..자넨 여기 있게,내가 가지."


할아버지는 일어나셔서 수정씨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지금 몇시에요?'


만도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시계를 보니 4시 였다.


"새벽 4시에요.오늘로 3일째 됐네요.내일이면 다 끝이에요."


끝이라는 말에 나와 만도 아저씨 모두 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칼을 들고

수정씨를 사정없이 쑤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 이에요!!


나는 할아버지를 향해 소리쳤고

만도 아저씨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우리의 말을 듣고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바닥에 내던지고

두 손을 들었다.


"이제 끝났어,이제 죽을 사람들은 죽었어.나를 믿어줘!

여기 그 종이는 내 역할이야."


할아버지는 우리 쪽으로 종이를 던졌고 나는 종이를 주워서 펼쳤다.


[당신의 역할은 '인구조절'입니다.본인포함 3명을 남겨주세요.

그 이하,그 이상도 안됩니다.]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 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뜨자 스피커가 달려있는 천장이 보였다.

일어나려고 고개를 들자 한밤의 끔찍했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뒤엉켰고,이내 할아버지가 수정씨를 찌르던 장면이 생각났다.


"으악!!"


침대 옆에 버젓이 앉아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진정시키려는지 멀찌감치 떨어졌다.


할아버지와 같이 내 곁에서 떨어져 있던 만도 아저씨는

무언가를 적더니 놀라서 바짝 긴장한 내게 보여주었다.


'당신 기절 했었어요.'


만도 아저씨가 종이를 보여주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두들겼다.

어느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거죠?"


"여기는 내 방이고 기절한 자네를 데리고 온걸세."


"그거 말고요,수정씨 일이요."


할아버지는 나의 질문에 움찔하시더니 이내 말씀 하셨다.


"그게 내 역할이라 어쩔 수 없었네..이왕 세 사람이 남는 거라면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사람들과 남고 싶었어.

그리고 처음부터 느낌이 왔네..

여기 있는 자네와,수염이 있는 친구는 안전할 거라는 느낌이.."


"그래서 만족하시나요?"


할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아무말씀 못하시고 고개를 숙이셨다.

나도 이해를 못 하는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목숨 또한 소중하니까..

하지만 수정씨를 죽이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할아버지를 바라보기 힘 들었다.


'여기 그 아가씨의 역할..'


만도아저씨는 내게 종이와 함께 메모를 보여줬다.

나는 만도 아저씨가 준 종이를 펼쳤다.

그것은 수정씨의 역할 이었다.


[당신의 역할은 '최후의 여자'입니다.

다른 여자를 죽이고 최후의 여자가 되어주세요.

본인이 죽이지 않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살려는 주겠지만

역할놀이를 제대로 했다고 볼 수 없겠죠?칼은 침대 밑에 있습니다.]


수정씨가 죽고나서 스피커를 통해 마구 웃어댔을 그 녀석 생각에

주먹이 쥐어졌다.


'엿 같은 역할놀이'


나는 이 빌어먹을 역할놀이가 앞으로 얼마나 남았나 보려고

시계를 보았다,밤 11시50분 이었다.

제한시간인 4일까지는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만 지나면 4일,정말 끝이다.'


끝이라는 단어에 다시금 긴장이 풀려 침대에 누웠다.


"자네의 역할이 위험하지 않다는 건 알겠는데 자넨 역할이 뭔가?

그냥 궁금해서 그러네.."


할아버지가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나에게 불쑥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정작 내가 맡은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순간 내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 것 같아서 불안해 졌다.


'역할을 말하기가 곤란한가요?'


만도아저씨가 종이를 내밀었다.


"아뇨,말하기 곤란하진 않은데

제가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나 싶어서요.."


사실 그랬다.

주변에서 워낙 큰 일들이 일어나서 정작 가장 중요한

내가 맡은 역할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역할이 뭐길래 그런가?"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만도아저씨 역시 궁금했는지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고,그 둘을 번갈아 보고 말했다.


"솔직한 사람이요."


할아버지와 만도아저씨는 내 말을 듣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야?역시 생각대로 별로 위험한 역할은 아니었지만

참 대단하군.."


할아버지는 내 역할에 대한 놀라움과

이제 더이상 끔찍한 일은 없을 거라는 안도감에 표정이 밝아지셨다.

그리고 나는 재빨리 이성을 되찾고 지금까지의 일들에 대해

생각을 더듬었다.


내가 역할을 잘 수행했는지 못했는지.

분명 나는 100%완벽하게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어느정도 내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시계를 보니 11시59분에서 12시로 넘어가려 했다.

어느정도 상황파악이 된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 했다.


"할아버지,안녕히 가세요."


[펑!]


기계가 터지는 소리와 함게 할아버지가 피토를 하시며 쓰러지셨다.

만도아저씨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너무 놀라 거칠게 숨만 쉬었다.


사실 내 역할수행에 대해 생각을 할때

나는 내가 종이를 펼쳤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당신의 역할은 거짓말 쟁이 입니다.모두를 속여주세요.]


이것이 종이에 적혀있던 내 역할 이었다.

지금가지의 나는 내가 맡은 거짓말쟁이 역할에 대해서

의식하지는 않았지만,계속해서 나도 모르게

모두에게 거짓말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수화를 할 줄 알면서도 모른 척 했고

수정씨를 골려주기 위해 음식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

모른다고 했다.

도와달라는 재희씨의 부탁에 도와준다고 해놓고 도와주지 않았고

정 선생님을 내 손으로 죽인다고 해놓고 죽이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일어날 거라고 했던 수정씨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을 알려주는 등의 간단한 의사소통을 빼고는 거의 거짓말 이다.

그리고 이건 정말 내 의지와 상관 없지만

내가 자살했다고 생각했던 재희씨는 아직 살아 있는게 분명했다.

내가 멀쩡히 살아 있는걸 보면..


그리고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그 사실은 확신으로 다가섰다.

왜 몰랐을까?

재희씨가 죽었을 때 다른사람이 죽었을 땐

역할이 뭔지 가르쳐 주며 떠들던 스피커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내가 너무 경솔했다.

단지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는 것만으로도

재희씨를 죽었다고 생각해 버렸다.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재희씨를..

재희씨는 자신의 옆구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별로 놀라지 않는걸 보니 눈치채고 있었나보네요 소형씨."


"재희씨,역시 죽지 않았군요,5분 전에 알았어요.

그나저나 재희씨한테 고마워 해야겠는걸요?

당신이 방에 들어가 스스로에게 총을 쐈을 때

사람들에게 당신이 죽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살아 있었죠,덕분에 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을 해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죠.

만약 당신이 진짜로 죽었다면 저는 진실을 말해서 죽어버렸겠죠."


"똑똑하시네요."


"저도 서울대 나왔거든요."


재희씨는 내 농담을 듣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만도 아저씨는 나와 재희씨의 대화가 이해가 안 됐는지

아직도 어리둥절해 하며 나와 재희씨를 바라 보았다.


"어짜피 끝났는데 당신의 역할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나는 재희씨의 역할이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역할을 맡았길래 죽은 척까지 하는지..


"저는 사실 경험자에요."


"경험자 라니요?"


"저는 이 전에 있었던 역할놀이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생존자 들 중 가장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서

이번에 다시 역할놀이를 하게 된 거죠."


재희씨의 말을 듣고 종이의 규칙이 다시 생각났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역할놀이를 못하신 분은 역할놀이를 다시 하게 됩니다.]


재희씨는 말을 하지 않고 대신 종이를 건냈다.


[당신의 역할은 시체3입니다.세번째로 죽는 시체역할을 맡아주세요.

물론 진짜로 죽으라는게 아닙니다.]


재희씨는 종이를 보고 있는 나를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제 역할이 시체다 보니,우선 시체처리를 맡은 사람을

처리 해야만 했죠,그 전의 역할 놀이에서

시체처리 역할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첫번째 희생자가 생겼고,밤에 잠 들지 않고

'누가 시체를 치울까?'하고 밤에 몰래 지켜봤죠.

역시나 누군가 몰래 나와서 시체 근처로 가더군요."


"세형학생이었죠."


"맞아요,그래서 만만하다는 생각에 혼자 처리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웬 아주머니가 나타나더군요.

예상 밖의 일이었어요,거기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당신도 나왔죠.

그런데 운이 좋게도 아주머니가 학생을 총으로 쏘더군요.

하지만 마냥 좋은 건 아니었어요.

여기서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더 죽으면

제가 세번재로 죽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필사적으로 총을 빼앗았군요."


"그래요,애당초 그 총으로 누군가를 해 할 마음은 없었어요.

그리고는 스피커에서 당신에게 세영학생의 가방을 보라고 했을 때

기회는 이때다 싶어 제가 대신 들어갔죠,

생각할 시간도 벌고,총알의 숫자도 세려고요.

정말 하늘이 돕는지 총알이 딱 하나 남아있었고

어줍짢은 연기로 대충 자살로 넘어갔죠.

그리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죠,물론 총으로 쏜 곳은

응급처치를 했구요."


[우!재희씨는 딱 한번 해보고 완벽하게 적응하셨네요?

대단해요!!하하하~]


스피커에서 감탄하는 그 녀석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제 모두 끝났으니 내보내 줘요."


나는 빨리 이 곳을 나가고 싶어 그 녀석에게 재촉했다.


[잠깐만요,평가를 해야겠죠?우선 재희씨는 두말할거 없이 통과!

정말 훌륭하게 본인의 역할을 했어요,

본인을 쏘는 희생정신도 뛰어났고,뛰어난 두뇌로 작전도 잘 세웠죠.

그나저나 여기에 남아야 하는 사람을 고르는게 참 힘들군요.

박 만도씨와 우 소형씨가 박빙인데요?후후후..]


지금 평가에 따라서 집으로 돌아갈지,아니면 여기 남아서

목숨을 건 역할놀이를 더 할지 결정된다.

너무 긴장이 되어 두 손에 땀이 흥건했다.


"우소형씨?본인이 역할을 잘 했다고 생각하나요,아니면

박만도씨가 역할을 더 잘했다고 생각하나요?

각자의 대답에 의해 결정을 내릴게요."


갑작스런 질문에 숨이 턱 막혀왔다.

바로 옆에 만도 아저씨가 있었지만 쳐다볼 수 없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용기를 내서 만도 아저씨를 쳐다봤다.

나와 마찬가지로 많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만도 아저씨가 더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저는 시간이라던지,이름같은 경우에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말해버렸다..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 해버렸다.


[그러면 박만도씨는 누가 더 잘했다고 생각하나요?]


박만도씨는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제가 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도아저씨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 이었는데

별로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아참!그리고 밖에 나가선 여기서 겪은 일들은

입도 뻥긋하지 말아주세요.후후후~]


[푸쉬이이이이..]


순간 우리가 있던 방에 가스가 흘러 들어왔다.

기분이 편안해지고 몸이 나른해 졌다.


[끼이이이익]


갑자기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있는 곳은 아스팔트 도로였고

주변에는 논과 밭이 보였다.


그리고 내 바로 옆에 급 브레이크를 밟은 택시도 보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끝까지 나쁜녀석이군,이런 곳에 내버려두다니..'


"이봐요,괜찮아요?이런..피까지 나네?차에 부딛혔어요?"


놀라서 택시에 내린 택시기사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에요,그냥 다친거에요.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죠?"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겪은 일을 말 하려다가

그 녀석의 마지막 말이 떠올라 거짓말을 했다.


"예?"


"정말로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그래요."


"여기는 충남인데요?"


맙소사.

서울에서 충남까지 나를 끌고오다니..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여기에는 버스도 없는데 택시 안타실래요?빈차인데

워낙 손님이 없어서..하하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택시를 탔다.

몇일동안 감금되어서 그런지 바깥이라는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어디까지 갈까요 손님?"


"그냥 가장 가까운 번화가로 가주세요."


"네~알겠습니다."


나는 우선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손님 다 왔습니다.일어나세요,13800원인데 13000원만 주십시오."


"예?"


너무 편안해서인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손님 돈 주셔야죠,설마 없는 건 아니겠죠?"


택시기사의 말에 잠이 확 달아났다.


'맞다,지갑이랑 핸드폰은 그 녀석이 다 가져갔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달랑 500원인데 어쩌지?'


"지갑을 잃어버려서 500원 밖에 없는데 어쩌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택시기사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손님,장난치지 마시고요,주머니좀 뒤져보세요.

뭐 찾아보지도 않고 지갑을 잃어버렸다니 참나,어이가 없어서!"


나는 지갑을 찾는 척 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놀랍게도 주머니에는 지갑과 핸드폰이 있었다.


나는 얼른 내 지갑인지 확인하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

주민등록증의 내 이름을 확인했다.


우상민.


맞다!내 지갑이 확실했다.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돈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택시기사에게 20000원을 주었다.


"잔돈은 필요 없습니다."


택시기사는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며 말했다.


"아이고,손님 거짓말도 잘치시네!하하하!"


나는 기분좋게 택시에서 내렸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밖에 있다는 것에 마음이 한없이 평안했다.

그 녀석의 마지막 질문에 거짓말쟁이 연기를 한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냥 그대로 말했더라면 지금 쯤 나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때 마침,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통화하기 힘드네?너 어디 있는거야?"


친구는 반가움 반 걱정 반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그냥 잠깐.."


"지금 어디야?"


"아..충남쪽."


"말을 하고 가야지 임마,애들이 얼마나 걱정한 줄 아냐?

술 취한 놈 데려다가 택시 태워 보냈더니,연락도 안하고.

그러고는 핸드폰도 꺼놓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혼자 놀러가고 싶냐?전화라도 해주던가."


그 다음부터는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들리지 않았다.


'아,택시기사..어쩐지 웃는게 낯이 익더라.'

-실종사고를 조사하시는 박상원 형사님. 저는 얼마 전 누군가에게 납치가 된 적이 있습니다.

신분을 노출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메시지를 남깁니다. 밑에는 제 연락처입니다. 사건에 대해서 보다 깊게

알고 싶다면 꼭 연락을 주십시오. ***-****-****



박 형사는 자신의 자동차 앞 유리에 볼품없게 꽂혀 있는 메모지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생각하던

박 형사는 최근 발생한 실종사고에 대해서 전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차에, 밑져야 본전이겠다

싶어 당장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락처를 남기고 간 사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후, 계속해서

그 연락처로 걸었지만 전화통화를 할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박 형사는 그 전화번호의

주인을 추적해냈다.


-최재희, 서울대생.


하지만 박 형사가 최재희의 신원소재를 파악하고 그를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그가 사라진 후였다.

박 형사가 최재희의 측근들을 조사해서 얻은 정보라고는, 그가 잠시 여행을 갔다가 알게 된 우상민이라는

사람과 자주 같이 다녔다는 사실뿐이었다. 박 형사는 그 후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최재희와 우상민을

찾아다녔지만 그들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일어나!!”


박 형사는 시끄럽게 조잘대는 자명종소리에 못 이겨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피곤이 쌓였는지, 아니면 사건이 안 풀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슴과 머리가 너무나

답답했다. 피곤함을 억지로 견뎌내면서 박 형사는 나갈 준비를 했다. 밖에 나가서 주차해 둔 차를 타려는

순간 박 형사의 눈에 익숙한 무언가가 보였다.

앞 유리에는 그 때처럼 쪽지가 놓여있었다.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져,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난 원진은 주위를 둘러봤다. 확실히 주변은

원진이 알던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원진은 자신의 두 손가락을 들어 볼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살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아오!! 아프다!! 뭐야, 꿈이 아니잖아”


원진은 붉어진 자신의 볼을 손바닥으로 비벼대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 떨어져가는 벽지와

자잘하게 균열이 가있는 천장을 보니, 친구들이랑 강촌에 놀러갔을 때 묵었던 낡은 숙박시설이 떠올랐다.

원진은 자신이 누워있던 허름한 침대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그러자 오래된 나무 바닥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다. 원진은 방안을 둘러보면서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문득 방 문 앞에 도달했을 때, 문에 붙어 있는 종이를 봤다.



역할놀이 규칙


-주머니 속의 쪽지를 보면 자신의 역할이 들어있습니다.

-제한시간은 4일, 역할놀이에 필요한 인원은 총 8명

-자신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되도록이면 비밀입니다.

(비밀로 하는 게 본인의 목숨을 위해 좋을 겁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 제대로 안하면 가슴에 달린 폭탄이 펑!

-멋대로 폭탄을 뜯어내려 해도 펑!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4일 동안 역할을 멋지게 수행하시면 살려드립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역할놀이를 못하신 분은 역할놀이를 다시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시작!




원진은 문 앞에 붙어있는 종이를 읽고,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손끝에 뭔가 올록볼록 튀어나온 게

느껴진 원진은 자신의 윗옷을 벗어냈다. 벗어낸 가슴팍에는 이상한 기계가 붙어있었다.

무심코 떼어내려고 손을 가져가는데 문 앞에 붙어있는 문구가 보였다.


-멋대로 폭탄을 뜯어내려 해도 펑!


‘이게 폭탄이가?’


원진은 긴가민가했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에 기계 쪽으로 다가가던 손을 황급히 빼냈다. 그리고는 윗옷을

다시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문구에 적힌 대로 주머니에는 종이쪼가리가 들어있었다. 원진은

접혀있는 종이를 쫙 펴서 읽었다.



역할놀이

당신의 역할은 ???입니다.

???????? 주세요.

(가장 어려운 역할이군요. 절대 성공 못할 겁니다.)



역할이 적힌 쪽지를 본 원진은 이런 장난을 치고 있는 녀석을 꼭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진은 방에 있던 화장실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문을 열고 나섰다. 문을 나서자 좁은 복도가 보였다.

복도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8개의 방이 늘어져있었다. 원진은 밖에 나가기위해 복도를 따라서 걸어갔다.

복도 중앙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어? 새로 깨어난 사람인가?”


복도 중앙에 있는 탁자에 둘러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원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복도 중앙에는 원진이

나이또래의 젊은 남자와 안경을 쓴 중년의 아저씨 그리고 교복을 입은 여고생 하나가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너무나 답답했던 원진은 다짜고짜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우리도 잘 몰라, 다만 상황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만 알아둬.”


“위험한 상황이요?”


“그래, 난 여기서 제일 처음 깨어난 사람이야. 아까부터 쭉 돌아다녔지만 도망칠 곳이라고는 없어. 저 두꺼운 철문이 열리지 않는 한 우리는 나갈 수 없어”


복도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복도 끝의 철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진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지만 그 젊은 남자는 서슴없이 원진에게 반말을 해댔다. 원진은 다시금 되물었다.


“혹시 몰래카메라 같은 이벤트 아닌가요?”


“저기 끝에 있는 방에 가서 문을 열어봐”


젊은 남자는 저 멀리 떨어져있는 방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원진은 약간 뜸을 들이다가 남자가

말한 방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 앞에 다다를 쯤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지만 원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힘껏 열었다. 방 안에는 두 구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고,

그 두 시체에서는 피비린내와 썩은 내가 풍겨왔다.


“우웩”


난생처음 보는 시체에 올라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원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구토를 해댔다.

복도 중앙에 있던 여고생과 아저씨가 걱정이 되는지,

원진에게 다가와 몸을 못 가누는 원진을 부축해주었다.


“너도 문 앞의 문구를 봤을 거라고 생각해. 이거는 장난이 아니야. 우리는 엄청난 위험에 처해있는 거라
고. 그리고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가는 저 시체들처럼 폭탄이 터져 죽어버릴 거야”


젊은 남자는 아직도 헛구역질을 하는 원진에게 쏘아댔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원진에게 아저씨가 물었다.


“그나저나 젊은이는 이름이 뭔가? 사실 젊은이가 오기 전에 우리들끼리는 벌써 통성명을 했거든. 서로 이름을 알아두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예? 이름이요?”


원진이 당황스러워하자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 이런 나부터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최승대라고 하네.”


“제 이름은 윤지은이요.”


승대 아저씨가 말을 마치자 옆에 있던 여고생이 끼어들며 말했다.


“예, 저는 이원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할은”


“잠깐, 자신의 역할도 말하려고?”


젊은 남자가 원진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순간 자신의 역할을 되도록 비밀로 하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아, 아니요. 휴,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네요.”


“난 문성훈이야. 네 역할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목숨이 걸려있을 만큼 중요한 거야. 명심해둬”


“네”


원진은 성훈의 카리스마에 눌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흠”


순간 천장에서 누군가의 헛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중앙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천장을 응시했다.

그들이 바라본 천장에는 스피커가 달려있었다.


“뭐지? 우리를 여기에 가둔 사람인가?”


“저는 여러분들을 이곳에 가두고 앞으로의 역할을 평가하고, 관리할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살기위해서는 쪽지에 적힌 당신들의 역할을 목숨 걸고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스피커에서는 듣기 거북한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당신 뭐야?”


원진이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4일. 열심히 역할놀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스피커에서는 더 이상 소리가 나질 않았다.


“죽여 버리고 싶군.”


상훈은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중얼거렸다.


“흠, 아마도 우리를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로 지켜보는 것 같군”


승대 아저씨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승대 아저씨의 말대로 주변에는 빨간 빛을 뿜어내는 카메라들이

보호막에 가려진채 천장 이곳저곳에 매달려 있었다.


“일단 나머지 사람들을 찾아보죠.”


상훈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머지사람이라니요?”


지은은 갑자기 일어난 상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8명이라고 적혀있었잖아. 그리고 여기에는 4명, 죽은 사람 2명. 남은 두 사람이 있을 거 아니야?”


성훈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성훈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중앙 복도에서 나와 방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죽은 거죠?”


복도를 가다가 원진이 물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무언가를 캐내려는 물음이었다.

원진의 물음에 다른 세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을 못했다.


“몰라, 내가 처음에 일어났을 때부터 이미 죽어있었어”


원진이 본인을 의심한다고 느낀 상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흠, 일단 죽은 두 사람의 방은 건너뛰고, 다른 방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요.”


원진은 나름 용기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앞에 있는 방문의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 철컥”


하지만 문이 안에서 잠겼는지 열리지 않았다.


“잠겨있는데요?”


원진이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누구시죠?”


순간 문이 열리면서 어떤 아저씨가 얼굴을 내밀었다. 원진의 얼굴을 본 아저씨는 놀랐는지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원진은 아저씨를 부축했다.


“나를 죽이려는 건 아니지?”


원진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아저씨는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원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원진은 아저씨를 진정시키기 위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역할에 따라서 목숨이 위험해질 수가 있다고 적혀있어. 내 가슴에 달린 폭탄도 봤고! 옆방에서 시체들도 봤다고!! 여기서 누가 나를 죽일지 어떻게 알아?”


아저씨는 막무가내로 방안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했다.


“아니에요, 위험하지 않아요. 제 역할도 위험한 역할이 아닌걸요?”


“뭔데?”


아저씨가 물었다. 원진은 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원진은 이내 솔직해지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역할을 털어놨다.


“제 역할은 우리를 이곳에 가둔 녀석을 죽이는 겁니다.”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 말을 들은 성훈이 원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사실이야?”


“네”


원진은 조용히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쪽지를 꺼내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원진이 꺼내 놓은 쪽지를 쳐다봤다.



당신의 역할은 해결사입니다.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역할놀이를 시키는 저를 죽여주세요.

(가장 어려운 역할이군요. 절대 성공 못할 겁니다.)




“이렇게 역할을 공개해도 괜찮으세요?”


지은이 안쓰러운 표정을 하며 원진에게 물었다.


“솔직히 괜찮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께 제가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박 형사는 서둘러 자동차 앞 유리에 붙어있던 쪽지, 그 쪽지에 쓰여 있는 그곳으로 향했다.

박 형사는 속도를 높였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일 분 일 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다른 동료들과 같이 행동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박 형사는 더욱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차를

몰았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불안해하던 아저씨는 사람들의 소개와 원진의 행동에 감동했는지 선뜻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제 이름은 임범진이라고 합니다. 아까 젊은이의 말대로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이곳을 빠져 나갑시다, 그리고 우리를 이 꼴로 만든 녀석을 잡읍시다.”


“흠,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성훈은 그런 것이 못마땅한지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범진 아저씨를 설득한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사람의 방문을 두들겼다.


“똑, 똑”


“누구냐?”


방안에 있던 마지막 사람은 노크소리에 즉각 반응을 했다.


“죄송하지만 같은 처지에 처한 사람들인데”


원진이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관심 끄고 꺼져”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신경질을 부리며 말했다.


“쿵!”


“뭐야? 당신!”


성훈이 문을 발로 차며 말했다. 문은 성훈의 발길질 한 방에 조금 찌그러졌다.


“씨발!! 미친 새끼들아!! 무슨 짓이야!! 꺼져버려!!”


방 안에서 욕이 나오자 상훈은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발로 문을 걷어찼다.


“그만두세요.”


원진과 승대 아저씨는 상훈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왜 막는 거야?”


“으윽!”


성훈이 자신을 막아서는 원진과 승대 아저씨를 뿌리치며 소리쳤다. 성훈이 강하게 뿌리치는 바람에

원진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지고, 승대 아저씨는 뒷걸음질을 쳤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저 방안에서 욕을 쏴대는 녀석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먼저 죽은 두 사람도 혹시 저 사람한테 당했을지도 모르잖아!”


성훈이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듣고 보니 그렇군, 만약을 대비해서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범진 아저씨가 성훈의 말에 동조했고 그 둘은 문을 두드렸다.


“이봐요, 말로 해결합시다. 우리도 당신처럼 끌려왔는데 서로 힘을 합칩시다.”


범진 아저씨는 노크를 연신 해대면서 방 안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웃기지 말고 꺼져”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혹시 말이야”


가만히 뒤에 서있던 승대 아저씨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혹시 뭐요?”


“저 방안에 있는 사람이 우리를 가둬놓은 사람이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잖아?”


그 말을 들은 범진 아저씨는 문고리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꺼져, 그냥 놔둬!!”


안에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그러니까 문 좀 열어봐요”


“그냥 놔두라니까!!”


어느덧 문고리가 박살났고 성훈과 범진 아저씨는 문을 억지로 뜯어냈다. 건물이 낡아서 그런지

남자들이 달려들자 문은 쉽게 뜯겼다. 방 안에는 남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씨발!! 미친 새끼들 저리 꺼져!!”


남자는 미친 듯이 날뛰다가 가장 앞에 있던 성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성훈은 재빨리 달려드는 남자를 발로

밀어내고, 양손으로 남자의 멱살을 잡더니, 이내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리고는 발로 차서 복도로 밀어냈다.


“당신! 똑바로 대답해!!”


성훈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


“펑!!”


뭔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있던 남자의 몸뚱이가 터졌다. 폭발음과 동시에 피와 살점과

내장 따위가 사방으로 튀었다. 너무나 놀란 지은은 비명도 못 지르고 주저앉았다. 그 남자와 가장 가까이

있던 성훈 역시 피와 신체의 찌꺼기들을 뒤집어 쓴 채 아무런 행동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모두가 놀란 순간 스피커에서 녀석의 말이 들려왔다.


“흠, 타인들에 의해 역할 수행을 제대로 못했군요. 거기 시체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분? 비위가 상하겠지만 시체의 바지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서 확인해줄래요?”


성훈은 심리적 압박감에 못 이겨 스피커의 지시대로 시체의 바지주머니를 더듬어 쪽지를 찾아냈다.

쪽지에는 핏방울이 동그랗게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성훈은 떨리는 두 손으로 쪽지를 폈다.



당신의 역할은 히키코모리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말고 방에만 계세요.

(참고로 히키코모리는 평소의 허현우씨, 바로 당신의 모습입니다.)



“방금 전 당신들이 죽인 사람의 역할은 히키코모리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4일 동안 방에만 박혀 있는 게 그 사람의 역할이었지요. 참 안타까운 희생자군요, 본의 아니게 역할 수행을 못해서 죽다니. 이게 모두 여러분 때문입니다.”


스피커에서는 모든 잘못을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떠넘기며 말했다. 얼이 빠진 성훈은 쪽지를 보고,

떨리는 몸을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원진은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시체를 보고는

또 주저앉아 바닥을 보며 토악질을 해댔고, 지은은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기절을

해버렸다. 그런 지은을 범진 아저씨가 들어다 지은의 방으로 옮겼다. 승대 아저씨 역시 멍한 표정으로

안경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에 죄의식을

느꼈는지 서로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첫째 날이 지나갔다.









“네가 죽였어!!”


폭탄이 폭발해서 죽었던 시체가 일어나서 원진에게 꾸물꾸물 다가왔다. 원진은 도망칠 수 없었다.

가슴팍에 구멍이 뻥 뚫린 시체는 서서히 원진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으악!!”


원진은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온몸이 흘러내리는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헉, 헉 후우”


원진은 아직도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원진은 땀으로 젖은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워서 방안에 있는 화장실로 힘겹게 걸어갔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원진은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더러운 땀과 피로 물들어진 얼룩을 모두 씻어냈다. 자신이 저지른 죄와 함께

씻겨가길 간절히 바라면서. 원진은 대충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무엇보다 혼자 있는 게 너무나 무서운 원진이었다.

복도통로에는 붉은색으로 굵게 선이 생겨있었다. 물론 그 붉은 선은 피였다. 원진은 그 피를 따라서

복도중앙까지 갔다. 그곳에는 성훈이 칼을 들고, 어제 죽은 남자의 시체를 토막 내고 있었다.

원진은 그 끔직한 광경을 보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으아!!! 무슨 짓이에요!!”


“잠깐, 오해야! 내 말 들어봐”


갑작스런 원진의 등장에 당황한 성훈이 말했다. 하지만 원진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무슨 일이야?”


승대 아저씨와 범진 아저씨는 원진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


“뭐야? 당신 뭐하는 거야?”


승대 아저씨는 온몸에 피를 묻힌 채, 칼을 쥐고 있는 성훈을 보며 말했다.


“오해라고, 자, 칼을 내려놓을게 안심하라고!”


성훈은 일단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칼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피가 묻은 손을 바지에 슥슥 닦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꽤나 긴장을 했다.


“이거 내 역할이 적혀있는 종이에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낸 성훈은 그것을 원진이 있는 바닥에 집어던졌다. 원진은 눈치를 보며 종이를

집어 들었다.



당신의 역할은 시체처리반입니다.

시체가 생기면 칼로 썰어서 중앙복도의 구석에 있는 수거함에 넣어주세요.

(칼은 침대 밑에 있습니다.)



원진을 그것을 보고 아저씨들에게 건넸다. 아저씨들은 그것을 보고,

성훈에 대한 경계를 어느 정도 풀고는 말했다.


“흠, 끔찍한 역할이군.”


“성훈씨는 비위가 좋으시네요.”


원진이 피범벅이 된 성훈을 보며 말했다.


“쳇, 얼떨결에 역할이 공개되었지만, 난 위험한 역할이 아니니까 걱정하지들마요. 누구는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이렇게 안하면 죽으니까 이러는 거지.”


성훈이 바닥에 있던 칼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시체를 썰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썰었다. 칼로 죽은 시체를 자르는 모습을 본 원진은 또 속이 뒤집히는지 이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상훈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구경할 거 없으니까 신경 끄고 저리가요,”


“알, 알았어요.”


범진 아저씨와 승대 아저씨는 상훈의 살기담긴 말을 듣고 즉각 자리를 피했다. 원진이 속을 게워내고

나왔을 때, 문 앞에 지은이 겁을 먹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아까 무슨 일이었죠? 비명소리가 들리던데”


원진은 지은에게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쳇, 나갈 수 있는 문이라고는 저 두꺼운 문밖에 없잖아”


범진 아저씨가 원진과 지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고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뒤따라 승대 아저씨도 왔다.


“창문도 없어, 온통 단단한 벽뿐이야, 저 문이 열리지 않는 한, 우리는 도망칠 수 없어.”


승대 아저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 위에 달려있던 시계 봤죠? 그 시간이 다 되서 이 역할극이 끝나면 우리는 풀려날 겁니다. 우리는 그 전까지 살아있기만 하면 되요”


범진 아저씨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우리를 가둬놓은 녀석은 끔찍한 살인마라고요! 분명히 우리 모두를 죽일 거예요!”


원진이 살짝 열을 내며 말했다.


“희망도 못 가집니까? 그렇게 죽는다고 생각하면 왜 지금 살려고 발버둥치는 겁니까? 차라리 남의 손에 죽을 바에 자살을 해버리지!”


범진 아저씨의 호통에 원진은 아무 말도 못했다.


“정말 역할을 수행하고, 끝까지 살아남으면 4일 후에 우리를 풀어줄까요?”


지은이 울먹이며 말했다. 가장 나이도 어리고 유일한 여자였던 지은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범진 아저씨는 자신의 딸, 정도의 또래인 지은을 다독였다.


“그래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우리는 살아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모두 힘을 합쳐야 돼요, 반드시 살아나가서 우리를 가둬둔 녀석에게 복수를 해야겠어요!!”


원진이 힘을 내며 말했다.


“흠, 오바이트나 하지 말라고,”


시체처리를 모두 끝내고 복도통로로 걸어 나온 성훈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씻으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쩌다가 이 꼴이 된 거지?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승대 아저씨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말했다.


"여기에 어떻게 잡혀왔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런가?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모두가 그런 거였군. 우릴 가둬놓은 녀석은 치밀한 지능범이군.”


범진 아저씨가 턱을 만지며 말했다.


“그 지능을 이상한데다가 쓰는 사이코라는 게 문제겠죠?”


승대 아저씨가 일어나며 말했다.


“배가 고프니 뭐라도 먹어야겠어, 독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상관없어, 그냥 냉장고의 음식을 먹어야겠어.”


“음식도 있었어요?”


원진이 방으로 들어가는 승대 아저씨의 뒤를 보며 물었다.


“흠, 방안의 냉장고에 음식이 있어. 빵하고 물 같은 것들이. 내가 봤을 때 음식은 안전해,”


범진 아저씨가 대신 설명했다.


“안전하다니요?”


“내가 어제 먹었거든”


음식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원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크게 났다. 민망한 원진은 식사를 하겠다며

일어서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저씨들의 말대로 방안의 작은 냉장고에는 간소한 먹을거리가 있었다.

그동안 게워냈던 것도 있고 해서, 더욱 허기가 졌던 원진은 급한 대로 빵과 물을 꺼내 허겁지겁 먹었다.

앞으로 먹을 여분의 빵과 물을 남긴 원진은 간만에 느낀 포만감에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오래 되서 낡은 침대라서 그런지 침대에서는 삐걱 소리가 났다.

나름 폭신한 침대에 그동안 잔뜩 움츠렸던 근육이 서서히 풀리며, 그렇게 원진은 잠이 들어버렸다.





“으악!!!!!!”





“꺄!!!!”



귀를 찢는 것 같은 비명소리에 원진은 잠이 깼다. 남자와 여자의 비명소리. 여자의 비명소리는 분명히

지은의 비명소리였다. 원진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원진 말고도 범진 아저씨와 승대 아저씨가

나와 있었다. 그들은 비명소리가 흘러나온 지은의 방 문 앞에 서있었다. 승대 아저씨와 범진 아저씨는

지레 겁을 먹었는지 원진의 뒤로 물러섰다. 하는 수 없이 원진이 문 앞으로 바짝 다가가 귀를 가져다댔다.

문에서는 지은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진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말했다.


“무슨 일이죠?”


순간 열린 문틈으로 지은이 달려와 원진에게 와락 안겼다. 원진은 놀라서 뒤로 주춤했다.

사실, 지은이 달려와서 안긴 것보다 지은의 옷가지와 손에 묻은 피 때문에 놀랐었다.

원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저씨, 방 안 좀 둘러봐주세요.”


승대 아저씨는 원진의 말을 듣고, 문을 열고 들어가 안을 살폈다.


“이게 뭐야? 성훈씨가 죽었어!”


원진이 생각한 대로였다. 지은의 몸에 상처하나 나지 않은 걸로 봤을 때, 그 피는 다른 사람의 피일게

분명했다. 원진은 자신의 몸에 들러붙은 지은을 간신히 떨어뜨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 거죠? 자세히 설명해요!”


지은은 원진의 다그침에 어느 정도 울음을 그쳤다.


“저, 저를”


“괜찮아요, 말해 봐요”


“저 남자가! 저를 강간하려고 했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지은이 소리쳤다. 원진과 승대 아저씨 그리고 범진 아저씨, 이렇게 모두는 지은의 말에 어리둥절해 했다.

승대 아저씨는 지은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강간이요? 그게 말이 됩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승대 아저씨의 추궁에 지은은 다시금 원진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흑흑, 정말이에요, 정말 내 옷을 벗기려고”


“이제 됐으니까 그만하세요. 일단 나중에 지은씨가 진정되면 이야기하자고요,”


원진은 지은을 자신의 방에 데려다놓고, 자신은 밖으로 나왔다.

물론 혹시나 있을 상황에 대비해서 문을 안에서 잠근 채로 문을 닫았다.


“그 여학생은 아직도 울어요?”


범진 아저씨가 복도 벽에 기대서, 팔짱을 낀 채, 원진에게 물었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진정됐을 거예요. 그냥 놔두세요.”


“이봐요, 원진씨. 왜 이렇게 감싸는 겁니까? 당신은 위험하지 않은 역할이라고 쳐도 저 여학생은 무슨 역할일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우리들 앞에서 버젓이 살인을 저질렀다고요. 당신은 괜찮다고 해도, 우리는 불안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범진 아저씨가 원진을 몰아세우며 물었다. 순간 천장의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군요. 안타깝습니다.”


“뭐라고? 안타깝다고? 이게 누구 짓인데!!”


승대 아저씨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흠, 어쨌든 유감입니다. 역할놀이를 하다보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저에게 화내신 안경 쓴 아저씨? 방에 들어가서 시체의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있는 쪽지 좀 꺼내주시겠습니까?”


그 녀석이 승대 아저씨를 꼭 집어 말했다.


“내가 네놈의 부탁 따위를 들어줄 것 같으냐?”


승대 아저씨가 강하게 소리쳤다. 아저씨의 두 주먹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유감스럽지만 부탁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명령’이라는 두 단어에는 은근한 협박이 들어있었다. 승대 아저씨는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이내 그 녀석의 지시대로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는 성훈의 시체가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는데 흉부 쪽이 심각하게 난도질 되어 있었다. 승대 아저씨는 눈을 질끈 감고, 시체로 다가가

바지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쪽지를 꺼낸 승대 아저씨는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문을 ‘쿵’

하고 닫았다.


“볼 필요 없을 텐데요? 우리는 성훈씨의 역할을 알잖아요. 그의 역할은 시체처리라고요.”


범진 아저씨가 쪽지를 가로채서 펴고는 말했다. 그의 말대로 쪽지에는 성훈의 역할이 시체처리라고

적혀있었다.


“크흠, 그래도 절차는 지켜야합니다.”


변조된 목소리를 헛기침을 한 차례 하며, 그 녀석이 중얼거렸다.


“절차? 네 녀석한테는 사람 목숨보다 절차가 더 중요하지?”


승대 아저씨가 참지 못하고, 그 녀석을 비꼬았다.


“잊지 마세요. 제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입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흉한 목소리의 협박에 승대 아저씨는 움찔했다.


“쳇”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를 위해서라도 버튼은 자신의 역할을 못했거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에만 누릅니다. 전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요,”


원진은 참으로 양심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덧 어수선했던 둘째 날이 지나가고

셋째 날의 아침이 밝아왔다. 원진도 그렇고, 승대 아저씨도 그렇고, 범진 아저씨, 모두 불안한 마음과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편히 잠들지 못하고, 복도 통로에서 날을 샜다.


“쳇, 뜬눈으로 날을 새버렸군. 얼마 안 남았는데 말이야”


승대 아저씨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원진씨는 방안에 있는 여자가 무슨 역할인지 걱정되지 않아요?”


범진 아저씨의 느닷없는 물음에 원진은 잠깐 졸다가 확 깨서 일어났다.


“네, 뭐라고요?”


“저 방안에 있는 여자가 무슨 역할인지 걱정 안 되냐고요?”


범진 아저씨는 다시금 되물었다.


“어차피 여자 하나입니다. 저희 셋이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젯밤에 지은씨가 강간을 당할 뻔 했다고 했잖아요. 그건 정당방위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진은 조목조목 따져가며 범진 아저씨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범진 아저씨의 표정은 점차 굳어졌고,

이에 옆에 있던 승대 아저씨가 말했다.


“강간이라고요? 성훈씨가 강간 같은 걸 할 사람으로 보였습니까? 물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줬던 행동거지가 좀 난폭하고, 거친 면이 없잖아있지만 우리에게 자신의 역할을 공개한 걸 보면 나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요. 게다가 결정적으로 당신은 어제 방에 처박힌 채, 안 나와서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어제 성훈씨와 그 여자는 꽤나 친했었다고요”


승대 아저씨의 말에 원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들의 말을 귀담아 들은 원진은 일어나서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며 지은을 불렀다.


“지은씨, 지은씨! 문 좀 열어봐요!”


하지만 안쪽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앉아서 원진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범진 아저씨가 일어서서

기지개를 하며 말했다.


“역할은 어찌될지 모르지만 오늘로 셋째 날이군요. 내일이면 이곳도 끝입니다.”


“만약에 우리를 가둬둔 녀석이 살려주지 않는 다면요?”


승대 아저씨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흠, 그런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군요.”


범진 아저씨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동차 앞 유리에 붙어있던 쪽지에 적힌 장소는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 박 형사가

찾아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루를 꼴딱 새운 끝에야 박 형사는 그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전 11시 50분. 먹은 것도 없이, 장소를 찾아 헤매느라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박 형사는 더욱 힘을 내며 차에서 내렸다. 풀숲이 꽤나 많이 자라서 걷기가 힘들었지만, 쪽지에 적힌 대로

그곳엔 오래된 건물하나가 있었다. 박 형사는 문을 열고 들어가, 쪽지에 적힌 대로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계단을 내려가자 두꺼운 철문 하나가 보였다. 박 형사는 쪽지에 적힌 대로, 철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덜커덩’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셋째 날 내내 지은씨는 방에 박혀서 꿈쩍도 안했고, 원진과 승대, 범진 아저씨는 서로를 경계하기 바빴다.

그러다가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너머 네 번째 날 아침을 향하고 있었다.


“내일 12시면 이 역할놀이도 끝나는 군.”


하지만 원진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꽤나 많았다. 다른 사람들의 역할이나, 처음부터 죽어있었던

두 사람 그리고 방에서 나오지를 않는 지은씨. 문을 부수려고 생각도 했지만 첫 번째 희생자가 떠올라

차마 문을 부술 수는 없었다.


“원진씨, 이거 먹지 그래?”


범진 아저씨가 자신의 방에서 꺼내온 빵과 물을 건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원진은 그것을 넙죽 받고는 이내 입에 쑤셔 넣었다. 자신의 방에 있던 음식을, 지은씨 때문에 꺼내서

먹을 수가 없어서 굶고 있는 와중에 먹는 음식이라 원진은 범진 아저씨가 고마웠다. 빵과 물을 허겁지겁

먹는 원진에게 범진 아저씨가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원진씨는 죽을 거야?”


원진씨는 놀라서 물을 뿜으며 대답했다.


“무, 무슨 말이죠?”


“아니, 자네 역할은 우리를 가둔 녀석을 죽이는 역할이잖아, 근데 이대로 12시가 되어버리면 원진씨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서 죽을 거 아니야?”


범진 아저씨의 말을 들은 원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실, 다른 사람들의 일에 급급해 정작 자신의

역할은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야겠죠.”


원진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빵을 내려놓았다.


“왜 더 안 먹어?”


“입맛이 없네요.”


원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12시가 되면 죽는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원진은

애써 참아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원진의 방에서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진씨, 원진씨”


“어? 지은씨?”


“원진씨, 지금 시간이 몇 시죠?”


지은은 문에 바짝 기댄 채, 원진에게 시간을 물어봤다.


“시간이요? 지금 11시 40분이네요. 앞으로 20분 남았네요. 하하.”


왠지 모를 허탈감에 원진은 웃음이 났다.


순간 원진의 앞을 승대 아저씨가 가로 막았다.


“더는 못 참아!! 나도 살고 싶다고!!”


승대 아저씨는 그렇게 외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방에 있던 침대 아래에서 날이 선

식칼을 꺼냈다. 그리고는 원진과 범진 아저씨를 협박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진정하세요!”


원진과 범진 아저씨는 칼을 쥐고 서서히 다가오는 승대 아저씨를 향해 소리쳤다.


“나도 살아야 한다고!! 제발 죽어줘!! 난 살고 싶어!!”


승대 아저씨는 소리쳤다. 순간, 범진 아저씨는 잽싸게 옆에 있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승대 아저씨는 잠깐 놀라더니 곧 원진을 목표로 삼은 듯, 원진에게 다가갔다. 원진은 순간 용기를 내어,

어차피 죽는다는 심정으로 승대 아저씨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양쪽의 방문이 동시에 열리면서 지은과 범진

아저씨가 나타났다. 범진 아저씨는 승대 아저씨의 뒤에서 양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어서 죽여!”


그러자 지은은 품에 있던 칼로 승대 아저씨의 머리를 목을 찔렀다. 그렇게 승대 아저씨는 비명 한마디

못 지르고 목에서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 원진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너무 놀라 뒤로 넘어졌다.

순간 천장의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지은씨, 당신이 칼로 찔러 죽인 그의 방, 냉장고를 보면 쪽지가 있을 겁니다. 그것을 꺼내 보세요.”


지은은 범진 아저씨와 원진의 눈치를 살피다가 방에 들어가서 냉장고를 열어 쪽지를 꺼내서 가져왔다.

그리고는 꼬깃꼬깃 구겨져 있던 쪽지를 펴냈다.



당신의 역할은 칼잡이입니다.

칼로 아무나 한 명만 죽이세요. 한 명만

(칼은 침대 밑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조심하세요.)



“그의 역할은 한 사람만 죽이면 되는 칼잡이였습니다. 양심이 있었던 터라,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역할은 잊고 있다가, 결국 살고자 하는 마음에 역할을 수행하려다 역으로 죽어버렸네요. 역시나 당신들이 죽였습니다.”


스피커에서 변조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여태까지 참고 있었다는 건가?”


범진 아저씨는 쓰러져있던 원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진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순간, 원진의 눈에

승대 아저씨의 목에서 칼을 뽑아내는 지은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 원진은

범진 아저씨를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위험해요!”


지은이 쥐고 있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원진과 범진 아저씨는 가까스로 칼을 피하고는 복도 끝의 문으로

도망쳤다. 시간은 11시 50분을 약간 넘어가고 있었다. 막다른 문에 들어선 범진 아저씨와 원진은

뒤를 돌아봤다. 지은이 칼을 들고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원진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지은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살아야 해요,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에요”


지은은 냉담하게 대답했다.


‘덜커덩’


순간 원진과 범진 아저씨가 등지고 있던 두꺼운 철문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설마 기적인가?”


원진이 중얼거렸다. 문이 열리고, 그곳에는 박 형사가 총을 들고 서있었다.

그리고 박 형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앞에 칼을 쥐고 서있는 지은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복도 전체에 울려 퍼지는 총성과 함께 지은은 맥없이 쓰러졌다.


“생존자들인가요? 어서 여기를 나갑시다.”


박 형사는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자하에서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원진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에요?”


“저기 형사님 이 건물 안에는 아직 우리를 가둬놓은 그 녀석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박 형사가 물었다.


“네 맞아요, 아직 건물 안에 있어요. 확실합니다.”


“전 제 역할을 수행해야겠어요. 가시려면 가세요.”


“저도 돕겠습니다.”


“그럼 같이 가죠.”


그렇게 셋은 계단을 계속해서 올라갔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출입금지- 라는 팻말이 붙은 실험실의

문이 보였다. 박 형사는 총을 양손에 꼭 쥐고, 그 문을 발로 찼다. 그러자 문이 활짝 열리면서,

수 십대의 모니터와 이상한 기계장치들 사이에 앉아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 하나가 보였다.

그 남성은 그들을 보고 재빨리 어떤 버튼을 누르려했다. 원진은 그게 폭탄을 터뜨리는 장치라고 확신했고,

박 형사에게 그를 쏘라고 말했다.


“탕!!”


“펑!!”


총소리와 폭발하는 소리가 동시에 퍼졌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원진은 눈을 서서히 떴다.

의자에는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수염 난 사내가 보였다. 그리고 옆에는 박 형사가 가슴이 폭발한 채,

죽어 있었다. 원진은 알 수 없는 상황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간은 12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패닉상태에 빠져있는 원진에게 범진 아저씨가 땅에 떨어진 총을 주워 총구를 들이밀고는 말했다.


“이번 역할놀이는 참 인재가 없네요. 하하하”


“네?”


“그나마 지은씨가 정의의 사도라는 역할로써 살인자들을 처단했지만, 뭐 처음에 히키코모리 역할을 맡았던 현우씨를 단체로 죽이는 바람에 곤란하게 됐지만”


원진은 어리둥절했다.


“그나저나 박만도씨는 불쌍해서 어떡하나? 역할놀이를 두 번이나 했는데 결국에는 죽어버렸네요, 아, 원진씨는 박만도씨를 모르죠? 저기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이 박만도씨에요. 일부러 위험하지 않게 ‘역할놀이 관리자’라는 역할을 맡겨줬는데”


범진 아저씨는 박만도라는 사람이 죽어있는 곳에 가서 책상에 놓여있던 쪽지를 꺼내 원진에게 던졌다.



*중요역할

당신의 역할은 역할놀이 관리자입니다.

저를 대신해서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그에 따른 설명을 해주세요.

아무나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제가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경험자인 당신이 잘 해내리라 믿습니다.

(이번엔 꼭 나가시기를)






원진은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진씨, 경찰의 주머니를 뒤져보세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원진은 미친 듯이 경찰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곳 역시 쪽지가 들어 있었다.






당신의 역할은 경찰입니다.

***시 ***동 ****로 찾아가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구하세요.

내일 12시까지 꼭.

좀 멀기 때문에 지금 출발해야 할 겁니다.

꼭 혼자 오셔야합니다.

참고로 그곳에는 당신이 찾는 최재희씨와 우상민씨도 있습니다.

(참고로 당신의 가슴에 달려있는 건 폭탄입니다. 행동하지 않을 시에 터질 겁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원진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아, 최재희씨와 우상민씨요? 그들은 여기 있습니다. 당신도 봤잖아요? 어떤 방에 있던 시체 두 구, 못 보셨나요? 규칙에 있죠? 역할놀이는 8명이서 한다. 나와 당신 그리고 처음에 죽은 히키코모리씨, 지은씨, 승대씨 성훈씨, 박만도씨, 그리고 저기 경찰, 무대는 점점 넓어진답니다.”


범진 아저씨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물론, 저 혼자서는 이런 일을 못 꾸미죠? 동료도 있답니다. 하하하”


“이럴수가”


“5,4,3,2,1”


범진이 중얼거렸다.


“뭐죠?”


“카운트다운이요, 12시가 됐네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셨네요.”


범진은 원진의 머리를 향해 총을 쐈다.


“탕!!”


ㅡㅡㅡㅡ



##1


“후우우, 후우우”


늦은 밤, 남자는 악몽을 꿨는지 자다가 벌떡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미적지근한 식은땀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는 누가 들을세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역할놀이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는 잔혹한 살인극이 막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악몽이 되어

그를 괴롭혔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서로를 죽이기에 혈안이 된 그들의 모습. 그런 그들을

죽이고 살아남은 자신. 핏빛얼룩이 지워지지 않은 손바닥과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

세상이 수십 번 변해도 잊혀 지지 않을 끔찍한 기억. 남자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몸을 쓸어내렸다.

목덜미에서부터 쓸어내린 손바닥이 정확히 그의 심장에 멈추었다. 그의 손이 정지한 심장은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거칠게 요동쳤다. 펄떡거리며 뛰는 그의 심장이 그에게 말했다.

복수를 하고 싶다고.










“최재희 씨?”


“어? 소형 씨”


그건 기막힌 우연이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옛날의 동지 아니, 적. 4일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둘은 그 자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윽고 그 둘은 조용한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희의 생각보다 소형, 아니 상민은 영악했다. 본명이 상민이라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재희는 숨이

턱 막혔다. 물론 그때의 역할놀이가 끝났지만 저런 순진한 얼굴로 모든 사람을 속인 상민이

무섭게 느껴졌다.


“재희 씨도 아직 있죠? 폭탄”


상민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은 재희 역시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상민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즐거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이 상황을 달관한 듯싶었다.


“따로 협박이 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이 폭탄은 족쇄로 보여 지네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굳게 닫으려는 족쇄”


재희의 말에 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놈 잡힐 거 같아요?”


재희가 묻자 상민이 곰곰이 생각했다.


“영원히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죠. 아직도 경찰은 단순한 실종사고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누구도 어딘가에서 살인놀이가 펼쳐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걸요?”


“놈한테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복수라뇨?”


“얼마 전 실종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형사를 봤는데, 상당히 많이 접근한 형사가 있더라고요. 그라면 그놈을 잡고, 우리에게 도움을 줄지도 몰라요.”


재희의 말에 상민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놈에게 발각되면 죽는 다는 걸 알고 있으신 거죠?”


“놈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접근해야죠.”


“어떻게요?”


재희는 숨을 고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2


매끄러운 아스팔트를 달리던 트럭이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로 들어서기 바로 직전, 운전사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며 흔들리려는 몸뚱이를 고정시켰다. 트럭은 곧 자갈과 돌 따위가

깔린 비포장도로로 들어섰고, 차체는 운전사가 예상했던 거보다 심하게 위아래로 요동쳤다. 전신에

힘을 잔뜩 줌으로써, 충격에 대비를 한 운전사는 가까스로 몸을 고정시켰지만, 조수석에서 졸고 있던

남자는 차체의 떨림에 맞춰 몸을 덜덜 떨더니, 끝내 옆 유리창에 머리를 쿵하고 처박았다.


“아오!! 아파라!!”


남자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통을 양손으로 삭삭 비벼댔다. 그 꼴이 꼭 동물원에서 재롱을 부리는

원숭이 같이 우스꽝스러워 운전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괜찮아? 푸훕! 푸하하!”


운전사이 큰소리로 웃자, 남자는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그리고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뭐가 웃겨요, 아파죽겠고만. 그나저나 이런 아스팔트도 제대로 안 깔린 촌구석에 우리 같은 업체를 부를만한 일이 있을까요?”


덜덜 떨리는 차체에 맞춰 남자의 푸념도 덜덜 떨렸다.


“낸들 아냐? 포장만 하는 게 아니라 운송도 해야 돼, 거기다 이번에 우리가 받는 가격을 생각해보면 잠도 못 잘 정도로 작업량이 많을 걸?”


그들의 업체가 포장하는 물건들은 주로 대형 쇠파이프나 고무호스 또는 공업용탱크 같은 공업용품

따위였는데, 주문받는 대로 그 크기에 상관없이 어떻게든 포장을 해야 했다. 대체로 나무판자나

철판으로 테두리를 감싸거나 특수제작 된 끈으로 떨어지지 않게 동여매면 끝이 났다. 말로는 쉽지만,

단 두 명이서 행동하기 때문에 큰 규모의 공업용탱크를 포장할 때는 반나절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물론 크기에 따라 보수가 꽤 짭짤해지기 때문에 그들의 업체에서는 작은 포장보다는 힘과 시간이 더

들더라도 커다란 포장하는 걸 선호했다. 그리고 오늘 사장이 그들에게 말했던 금액으로 봐서 오늘

포장해야 할 놈은 보통 놈이 아니었다.






“이야!! 대박주문이 들어왔다. 야, 네들 둘이 다녀와라”


전화통화를 마친 사장님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피운 채, 사무실에 앉아서 쉬고 있던 직원들에게 다가왔다.

평소에 콤플렉스라며 웃을 때마다 가리던 툭 튀어나온 앞니를 그대로 드러내며 웃는 걸 보니 뭔가

큰 건수를 건진듯했다.


“얼마나 대박인데요?”


남자는 모자를 반듯하게 고쳐 쓰고, 책상에 놓여있던 목장갑과 트럭열쇠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름의 출동준비였다.


“얼마나 대박이냐고? 큰 거 5장”


사장은 살이 쪄서 두터운 손가락을 쫙 펴 보이며 말했다.


“오백이요?”


오백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생각보다 높지 않은 금액에 실망해서 영 아니라는 투로 고개를 흔들었다.

오백이면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왕래하는 고무회사에서 정기적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이었고,

몇 달에 가끔 있는 팔백짜리 롤러보다 못한 금액이었다.


“오백? 장난하세요?”


“아니, 오천!!”


그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사장은 오천이라고 소리쳤다. 그가 입을 떼자마자 사무실에 있던 전원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앉아서 느긋이 있던 다른 직원들도 생각지도 못했던 큰 액수에 의자를 넘어뜨리며

일어났다.


“오, 오, 오천이요?”


“한 건에 오천?!!”


너무나 큰 액수에 말을 더듬었다. 오천이면 역대 최고로 받았던 금액보다 다섯 배나 높은 금액의

건수였다. 사장의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그래, 오천! 액수가 커서 경력 좀 있는 너희들 시키는 거니까 잘하고와!”


사장님이 으쓱거리며 말했다.


“어딘데요? 어디까지 가야돼요? 대기업이에요?”


“아니, 기업단위가 아니라 개인이야, 저기 충북 어디냐, 아무튼 멀지는 않은데 좀 후미진 곳이야”





“이야, 진짜 후미진 곳이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내비게이션 쓸모없어지는 지역이었다. 길은 길이 아니었고, 주변에 건물이나

하다못해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맞긴 맞는 거야?”


재민이 사장님이 준 종이쪽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순간 주변을 돌아보는

그들의 눈에 헐렁한 추리닝 차림의 아저씨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저긴가 보다”


그들은 추리닝 차림의 아저씨 곁에 차를 세우고,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아저씨를 보니

후줄근한 게 더욱 후져보였다. 겉으로 봐서는 오천만원이라는 큰 액수를 지불할 만큼 부유해

보이지 않았다. 그 후줄근한 아저씨는 뭐가 그리 급한지, 지금 막 도착한 그들에게 옆에 있는

나무박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겁니다. 오늘 옮겨야할 물건입니다. 오늘 안에 조심히 옮겨다 주세요.”


5천만 원이라는 큰 액수에 비해 너무나 작은 나무상자 몇 개에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다예요? 더 없어요?”


“예, 대신 안에 중요한 물건이 있으니까, 조심해서 오늘 안에 꼭 이곳으로 전해주세요.”


아저씨는 남자에게 종이쪽지를 건넸다. 그곳에는 대충 그려놓은 지도와 글자 몇 줄이 적혀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행동했다. 워낙에 적은 작업량에 순식간에 일이 끝나버렸다. 사실 일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게 이미 포장된 나무박스에다가 판자만 덧대 거뿐이라 실질적으로는 그냥 운반 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뭔가, 김빠지는 데요?”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치?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별로네, 일을 한 거 같지도 않아”


그들은 박스를 모두 옮기고 트럭에 몸을 실었다.


“그럼 조심히 옮겨주세요.”


“예,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트럭이 출발하고, 얼마 가지 않아 운전을 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무 일이 빨리 끝나서 시간이 많이 남네.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할까?”


그는 손으로 소주를 마시는 제스처를 취하며 물었는데, 그 손짓이 꽤나 가벼워 보였다.


“그래도 될까요?”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은 했지만,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기 일보직전이었다.


“뭐, 어때? 시간도 많은데 한 잔하자”


“그래요”










#3


뒤집어진 트럭이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있다. 몇 바퀴를 굴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체가 많이 손상되어

트럭,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트럭에 실려 있던 내용물들도 도로 한복판에 쏟아져 있었다.

돌아다니는 차가 많았더라면 사람 꽤나 죽었을 대형교통사고였을 테지만, 다행히 도로가 한적했던

덕분에 인명피해는 별로 없었다. 사망자는 운전자와 조수석에 탄 두 남자뿐이었다.

이만하면 싸게 끝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정작 문제는 교통사고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문제는 트럭에 실려 있던 박스의 내용물.

트럭에 실려 있던 박스들이 떨어져 산산 조각났고, 그 안에서 예상치 못했던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코를 찌르는 구린내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이겨진 살덩이들.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곧장

달려온 윤 형사는 이마에 잔뜩 주름을 내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꽤나 연륜이 묻어나는 주름을 띈

그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 뭐야? 도대체 뭐가 쏟아져 나온 거야?”


윤 형사는 코끝에 시큼한 냄새가 걸리는지 코를 연신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핏덩이의

양으로 봤을 때, 한 두 구의 시체가 아니었다.


“예, 그게 도로에 널려 있는 게 사람의 살덩이로 보여 지는 데요?”


옆에서 조사를 하던 수사관이 윤 형사를 뒤따라가며 대답했다.


“그걸 몰라서 묻나? 아니, 도대체 시체가 왜 이런 곳에 널브러져 있는 거냐고? 그것도 이런 대낮에 도로 한복판에, 도대체 누구야? 처음에 현장에서 연락할 때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지껄인 놈이!!”


“저, 저는 아닙니다.”


수사관이 대답하자 윤 형사가 정색을 했다.


“장난해?”


“죄송합니다.”


표정을 구기던 윤 형사가 답답했는지 담배를 물었다. 그는 항상 답답하거나 깊이 생각하고 싶을 때,

담배를 물곤 했는데 지금 이 딱 그랬다.


“그래, 뭐 조사한 거 있어?”


“네, 있습니다. 신원조사를 해본 결과 운전자와 조수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포장운송 전문 업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송재민과 김영민. 트럭에 적혀있는 운송업체에 연락해본 결과 그 둘은 오늘 아침에 회사에서 나와…….”


“그러니까 차에 타고 있던 놈들은 그냥 주문받고 운송만 해주는 놈들이라는 거지? 여기 처참한 꼴을 만든 장본인이 아니라는 거잖아?”


윤 형사가 말을 딱 잘랐다.


“그러니까 그게 사고의 원인은 음주운전으로 추정되는데, 그게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근처 술집에서 그들이 술을 마시고…….”


“펑!!!”


순간 시체를 수거하던 현장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윤 형사와 수사관 모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굉장한 크기의 폭발음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소음이었다.


“뭐야? 이 소리는?!!”


윤 형사가 물고 있던 담배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으아아아!!!”


폭발음이 난 곳에서 순경하나가 팔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폭발물에 손을 다친 것으로 보여 졌다.


“이봐, 괜찮아? 빨리 응급처치 해”


윤 형사의 명령에 사람들이 달려와 그를 데려가 응급처치를 했다. 다행히 손모가지는 그 자리에

붙어있지만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게 툭 건드리면 떨어져 나갈 거 같았다. 게다가 화상도 꽤나 심해서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테러야? 아니면 뭐야?”


놀란 수사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시체에 폭발물이 장착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시체를 수거하던 대원 하나가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슴부위 쯤으로 보이는 살덩이였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기계가 부착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게 폭발물인 거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윤 형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모두들 살점 수거할 때 조심해! 폭발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빨리 본부에 연락해서 폭발물전담 불러와”


“예, 알겠습니다.”


윤 형사는 그렇게 소리를 치고는 침을 찍 뱉었다. 왠지 큰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입안이 텁텁해진

윤 형사는 다시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깊게 한 모금 빨았다.





얼마 후, 트럭에 실려 있던 시신들의 신원을 검사한 결과가 나왔다.

최근 실종사건이 접수된 사람이라는 점,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흔적들 그리고 폭발물.

꽤나 여러 가지의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물론 각 시신별로 흉기에 찔린 상처부위라던가,

총알이 관통한 흔적 그리고 폭발 등, 사인은 다양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 형사는 역시 실종사건의 단서를 찾아 나선 거였군요.”


조사파일을 보던 임 형사가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의 손에 들린 신원조회 명단에는 동료였던

박상원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얼마 전 조용히 사라져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박 형사의 이름을 본 그는

단박에 그가 관련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됐어, 그만 해”


윤 형사가 흥분한 임 형사를 다그쳤다.


“그렇지만!”


“너, 내가 경고하는데 이 사건 해결하겠다고 날뛰지 마, 박상원이처럼 되기 싫으면”


붉어진 눈으로 노려보는 윤 형사의 말에 임 형사는 울분을 삭혔다. 윤 형사는 그에게서 명단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명단에 적힌 이름들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 24세 최재희 (폭사로 추정)


- 24세 우상민 (폭사로 추정)


- 22세 이원진 (두개골에 총상)


- 32세 박상원 (폭사로 추정)


- 18세 윤지은 (흉부에 총상)


- 41세 박만도 (두개골에 총상)


- 29세 문성훈 (흉기에 의한 외상)


- 38세 최승대 (흉기에 의한 외상)


- 30세 허현우 (폭사로 추정)


‘어째서’


“윤 형사님, 이거 운전자의 옷에서 나온 쪽지입니다. 혹시나 단서가 되지 않을까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윤 형사에게 현장에서 만났던 수사관이 구겨진 종이쪽지를 건넸다.

그 쪽지에는 어딘지 모를 주소가 적혀있었다.


“이게 무슨 주소야?”


“아마 사고가 난 트럭의 목적지로 보여 집니다.”


“그래? 그럼 당장 가봐야겠군, 지금 어디선가 실종당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을 테니까”


윤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럼 넌 가보고, 임 형사 너는 대기하고 있어”


“같이 가면 안 됩니까? 선배님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임 형사가 따지자, 윤 형사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따라오지 마, 이건 명령이다. 알겠어?”










###4


몸이 허공에 붕 떴다가 툭하고 떨어진 느낌이랄까? 간밤에 한 번도 뒤척이지 않고, 잠을 푹 잤음에도

뭔가 만족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숙면을 하고 난 뒤의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피부도 푸석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양손바닥으로 뺨이 한껏 붉어지도록 두들겼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순간 콧속으로 들어오는 낯선 공기.


“뭐지?”


단숨에 알 수 있는 낯선 공기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관인지, 친구의 집인지 분간은 되지 않았지만 확실히 내게 있어서 익숙한 공간은 아니었다.

낯선 곳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계산했다. 일단 내 침대가 아닌 곳에서

당장에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는 동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어쩐지 침대가 삐걱 거리더라’


나는 좀 더 자세히 주변을 살폈다. 삐걱거리는 침대며, 조그만 화장실, 조그만 냉장고. 딱 한 사람이

먹고살기에 적당한 공간이었다. 얼핏 혹시 이곳이 친구의 자취방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우야 있냐? 민준아??”


쥐죽은 듯 조용한 공간에 내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빨리 이 낯선 곳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면에 보이는 문을 향해 걸었다. 순간 눈앞에 뭔가가 적혀있는 종이가 보였다.





역할놀이 규칙


-주머니 속의 쪽지를 보면 자신의 역할이 들어있습니다.

-제한시간은 4일, 역할놀이에 필요한 인원은 총 8명

-자신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되도록이면 비밀입니다.

(비밀로 하는 게 본인의 목숨을 위해 좋을 겁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 제대로 안하면 가슴에 달린 폭탄이 펑!

-멋대로 폭탄을 뜯어내려 해도 펑!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4일 동안 역할을 멋지게 수행하시면 살려드립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역할놀이를 못하신 분은 역할놀이를 다시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시작!






“이게 뭔 소리야?”


글을 본 순간 머릿속에 지난주에 극장에서 봤던 심야영화 한편이 떠올랐다. 미치광이 살인마가

사람들을 가둬놓고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공포영화였는데, 그런 종류의 영화를 즐겨본지라

꽤나 재미있게 봤었다.


‘에이, 설마? 가슴에 달린 폭탄?’


딱히 종이에 쓰인 글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더듬었다. 불행하게도 가슴팍을 더듬는 손끝에 뭔가 딱딱한 느낌이 전해졌다. 흠칫 놀라서

얼른 윗옷을 걷어 올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가슴팍에는 뭔가가 붙어있었다. 요상하게 생긴

기계장치였는데, 아마도 글귀에 적혀있던 폭탄인 듯싶었다.


“뭐야?!”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내가 잠든 사이 내 몸뚱이에 이런 괴상한 장치를

달아놓았다는 사실에 놀라 소름이 돋았다. 나는 또 다른 뭔가가 장치되어 있나하고, 손으로 몸을

구석구석 더듬었다. 다행히 다른 신체부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핸드폰이며, 지갑이며

소지하고 있던 물건들이 전부 사라져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나는 일단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문고리를 돌렸다. 별 힘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문고리가 맥없이 돌아갔다. 예상 밖이었다.

문이 꽁꽁 잠겨 있을 것을 대비해 문을 부숴버릴 각오까지 하고 있었기에 살짝 당황해질 정도였다.

박차고 나온 문 바깥은 여느 숙박시설처럼 복도식이었고, 복도의 좌우 옆으로 방문이 쫙 늘어서 있었다.

그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인기척에 숨을 죽이고는 복도를 걸었다. 순간 복도중앙 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남녀의 목소리가 뒤섞여, 괴상하게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었다. 복도 중앙에 다다를 쯤부터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복도 벽에 기대어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리고는 모퉁이에 숨어서 살짝 엿봤다. 복도중앙에는 커다란 탁자가 있었는데

4-5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 뒤에서 숨지 말고 나오지 그래”


순간 복도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꽤나 무게 잡힌 목소리로 말했다. 말한 내용으로 봤을 때

모퉁이에 숨은 나를 지칭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가 어디죠? 당신들은 누구죠?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궁금했던 것들이 입을 통해 폭발했다.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인 나머지 나조차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우리한테 묻지 마세요, 당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니까”


정면으로 마주한 곳에 앉아있는 여자가 말했다.


“같은 처지라뇨?”


“기억나지 않죠?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


그러고 보니 그에겐 이곳에 잡혀온 기억이 없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냥 평소처럼 잠이 든 것,

그뿐이었다.


“저기요, 그러면 당신도”


“사람이름 놔두고 여기요, 저기요 할 건가요? 앞으로 4일 동안 같이 지내야하는데 이름정도는 서로 알아둬야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통성명했습니다. 저는 이호영이라고 합니다. 뭐, 딱히 반갑지는 않지만”


옆에 앉아있던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나 말투로 봐서 상당히 남자다운 성격으로 보여 졌다.


“김은혜라고 해요”


내게 같은 처지라고 말한 여자가 불쑥 말했다. 짧은 단발머리 때문에 중성적인 느낌이 풍기는 모습의

여자였는데 호영 씨 못지않게 성격이 남자다웠다.


“문혜란입니다.”


은혜 씨 옆에 앉아있던 파마머리 아줌마도 이어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냥 철이 아저씨라고 불러”


처음 나를 알아챘던 아저씨가 내 등을 치며 말했다. 왠지 철이 아저씨에게 있어서는 이 상황이 낯설지

않은 듯했다.


“예, 제 이름은”


“놀고들 있네.”


이름을 말하려는 찰나,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이를 구경하던 학생 하나가 중얼거리며 말을 잘랐다.

그는 교복차림의 학생이었는데 교복을 입은 행색이나 염색을 해서 샛노란 머리에 귀에 귀걸이까지 한

걸로 봐서는 보통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학생, 아까부터 예의 없는 짓만 골라서 하는데 눈에 거슬려?”


호영 씨가 학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학생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를 똑같이 노려봤다.

팽팽한 눈빛이 오고가는 가운데 학생이 말했다.


“아주 착각들을 단단히 하고들 있네요, 통성명은 무슨”


학생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냥 저 날라리 말은 무시하죠.”


호영 씨 역시 학생에게서 시선을 떼며 무시했다.


“지금 우리가 총 6명이죠?”


혜란 아줌마의 갑작스런 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총 여섯 명이네요.”


처음에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철이 아저씨와 그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은혜 씨 그리고 파마머리가

잘 어울리는 혜란 아줌마, 안경을 써서 똑똑해 보이지만 실제 성격은 남자다운 호영 씨,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학생 그리고 나.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이었다. 도무지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래가지고는 내가 왜 이곳에 잡혀왔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8명까지 앞으로 2명 남았군요. 사람이 모두 모이면 역할놀인지 뭔지에 대해서 우리를 잡아 둔 사람이 설명해 준다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호영 씨가 안경을 올려 쓰며 말했다.


“우리를 잡은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내가 묻자, 호영 씨가 천장을 바라봤다. 나 역시 호영 씨의 시선을 따라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커다란 스피커가 있었다. 뭔가 더 있을 거 같다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우리를 감시라도

하려는 모양새로 복도 여기저기에 감시카메라와 스피커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나요?”


호영 씨가 즉각 대답했다.


“제가 여기 계신 분들이랑 같이 복도 끝의 철문을 두드리자 말하더군요. 사서 고생하지 말고, 8명이 모이면 설명해 줄 테니까 얌전히 있으라고요. 물론 변조된 목소리로요.”


차츰차츰 상황이 이해가 갔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보다 상황파악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머니 속의 쪽지를 보면 자신의 역할이 들어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방문에 적혀있던 글귀가 떠올랐다.


‘아, 내 역할’


근데 뭔가 이상했다. 방에서 폭탄을 보고 놀라 스스로 몸을 뒤졌을 때, 주머니도 분명히 같이 뒤졌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금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떨어뜨렸나?’


“잠깐 방에 좀 다녀올게요.”


“그러세요.”


나는 내가 나왔던 방으로 걸어가며 바닥을 살폈다. 혹시나 복도바닥에 떨어뜨리지는 않았을까하며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역할이 적혀있는 종이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에?’


구석구석 방도 살피고, 누워서 잠들었던 침대도 살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조급해진 나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다시금 문에 적혀있는 글귀를 봤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 제대로 안하면 가슴에 달린 폭탄이 펑!



‘그러니까 나는 그 역할이 뭔지 모른다고’


가슴에 장착된 폭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역할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이 살인마가 벌여놓은

놀이에 참여를 하라는 건지, 나로서는 죽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똑똑, 나와 보세요, 모두 모였어요.”


방을 뒤적이는데 은혜 씨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예, 나갈게요.”


대답할 기운이 없었지만 겨우 대답해냈다.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왜 하필 이 글귀가 눈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5


“너 이 새끼, 그 사건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 했지? 헛소리하지 마. 너 아직 젊은 놈이 제멋대로 단독으로 행동하다가 사고라도 치면 나중에 문제 생겨. 뭐? 문제생겨도도 상관없어? 미쳤냐? 뭐? 지금 어디냐고? 주차장인데 왜?”


전화통화를 하며 길을 가던 윤 형사의 눈에 쪽지가 보였다. 자동차 앞 유리에 붙어있는 쪽지였는데,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갔다. 그것은 대리운전 광고라던가, 술집 광고가 아닌 누군가 직접 써서 보낸

쪽지였다. 윤 형사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쪽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쪽지에 적혀있는

내용을 읽었다.


“빌어먹을”


윤 형사는 주변을 살피고는 그 쪽지를 자신의 품에 넣었다.










###6


“8명이 모두 모였으니 설명을 드리죠.”


8명이 모두 모이자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아까는 없었던 사람이 소리쳤다. 긴 머리에 수염을 길러서 그런지 지저분해보인 그 남자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될 모양이었다. 좀 전의 나처럼.


“기다려 보세요.”


나는 남자를 향해 아저씨처럼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애써 차분해 보이려는 말투였지만 긴장을

한 얼굴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뭘 기다려요? 이게 뭡니까? 사람 불러다 놓고 이상한 기계를 설치해 놓고, 역할놀이라뇨? 뭐가 좋다고 우리가 이 미친놈에게 장단을 맞춰줘야 합니까? 누구 핸드폰 가진 사람 없어요? 빨리 경찰에 신고합시다.”


“신고를 했으면 벌써 했죠, 우리가 바보인줄 압니까? 일단은 진정하고 우리를 가둬놓은 이의 요구가 뭔지 들어봅시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대조적인 두 남자였다. 한 남자는 흥분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질러댔고, 그를 마주한 나는 조용히 앉아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 머리가 긴 남자는 나의 차분한

태도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당신 뭐야? 당신은 왜 이렇게 침착해? 혹시 당신도 한 패거리야?”


“여기에 계속 있으려면 침착해야만 합니다.”


호영 씨가 나를 거들었다.


“한 패거리?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철이 아저씨 역시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어, 가슴팍을 드러내며 나를 거들었다. 아저씨의 가슴에는

그와 같은 폭탄이 장착되어 있었다. 아저씨다운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본 머리긴 남자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에헴”


긴 머리의 남자와 같이 나중에 타나난 노인이 헛기침을 한 번했다.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도

많은 게 누가 봐도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노인은 헛기침을 두어 번 정도 더하고 입을 열었다.


“근데 이 폭탄이라고 달려있는 게 확실히 작동은 하는 겁니까?”


확실히 그 노인의 말이 맞았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팍에 달린 폭탄이 확실히 폭탄인

것도 모르는 일이었고, 왜 잡혀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확실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도 몰랐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거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위험하다는 것.


“폭탄의 성능은 아주 뛰어납니다. 제가 장담하죠. 하하하”


조용했던 스피커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저건 뭐죠?”


혜란 아줌마가 복도중앙의 벽면을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와우, 아줌마 대단하신걸요? 지금부터 시작될 역할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차리셨군요. 뭐, 기념으로 아줌마가 가셔서 상자를 열어보도록 하죠.”


스피커의 지시에 아줌마가 도움을 요청하는 얼굴로 주변을 봤다.

아마도 혼자서 저 상자를 열기가 겁나는 것 같았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왠지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거 같아 직접 나섰다.


“고마워요, 학생”


나는 아줌마와 함께 그 상자로 다가섰다.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상자였는데, 상자 주변에 왠지

음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내가 상자에 손을 데려하자, 탁자 주변에 있던 몇몇의 사람들도 궁금했는지,

우리의 뒤를 따랐다.


“자물쇠의 번호는 0516입니다.”


스피커가 내뱉는 말에 그다지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상자에 다가가 그가 말한 번호대로

자물쇠를 열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우와”


“세상에나”


“진, 진짠가?”


상자 안에 담겨있던 내용물이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상자 안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돈다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하하하, 모두들 놀라셨군요. 후후, 두당 1억씩 총 8억입니다. 역할놀이가 끝나면 모두에게 나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물론 역할놀이를 성공적으로 끝낸 분들만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정해준 역할만 제대로 수행하면 이 돈을 준다는 말이죠?”


호영 씨가 놀라며 물었다.


“쯧, 젊은이가 벌써부터 돈에 혹하다니”


의자에 앉아서 지켜보던 노인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듯한 노인의 말투에

기분이 상했는지, 호영 씨가 노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혹하다니요?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지나치긴, 돈을 보자마자 눈빛이 확 바뀌던 걸. 하긴 그 정도 액수면 젊은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만하지, 근데 큰돈은 절대로 쉽게 얻을 수 없어.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지, 명심해둬”


“하하하, 어르신의 말이 옳습니다. 큰돈을 얻으려면 노력이 있어야하죠. 그러니까 모두들 열심히 역할놀이를 해주세요.”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확실히 성질을 긁는 특유의 뭔가가 있었다.


“근데 말이에요, 지금 나눠가져도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요? 돈이 꽁꽁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눈앞에 있는데 지금 1억씩 나눠가지는 게 어떨까요?”


돈을 멍하니 바라보던 혜란 아줌마가 제안했다. 듣기에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아직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애초에 각자의 몫을 확실하게 챙겨두는 것도 좋아보였다.


“똑똑하신데요? 하하하, 마음대로들 하세요.”


우리를 가둬 둔 놈 역시 혜란 아줌마의 제안에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괜찮은 생각인 거 같은데요?”


나 역시 동의했다. 안 그래도 가난한 대학생인데 1억이라니, 물론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1억은 상당히 큰돈이었다.


“전 반대합니다. 혹시라도 각자 1억씩 가져갔다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돈에 욕심이라도 부리면 어떻게 합니까?”


호영 씨는 내 생각과는 반대였다.


“쯧쯧, 남의 돈에 욕심을 부리는 사람? 젊은이 사람들이 다 자네 같은 줄 아는가?”


그 노인은 처음부터 호영 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호영 씨가 무슨 말만 하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할아버지, 어른도 어른다워야 아랫사람이 예의를 갖추는 겁니다.”


노인과 호영 씨 사이에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순간 날라리 고등학생이 돈이 있는 상자에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느닷없이 돈을 집어서 꺼냈다.


“학생, 뭐하는 거야?”


철이 아저씨가 놀라며 묻자, 그 날라리 고등학생은 아주 뻔뻔스러운 얼굴로 아저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기 몫 챙기자면서요? 그래서 내 몫 챙기는 건데요?”


“아직 결정된 거 아니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그 돈 다시 넣어놔”


할아버지 때문에 열을 좀 받은 호영 씨가 분을 삭이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요? 나쁜 말로 할 수 있으면 하세요.”


“어린 노무 새끼가 돌았나!”


호영 씨가 거칠게 내뱉었다. 험악한 분위기에 모두가 눈치를 봤지만 그 날라리 고등학생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호영 씨를 노려봤다.


“아저씨, 어린놈한테 한 번 죽어 보실래요?”


사실 요즘 학생들이 겉멋을 부리며 남들을 겁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날라리 고등학생은

진짜였다. 진짜로 살기가 느껴졌다.


“험악한 분위기 만들지 말고 진정들 합시다. 우리끼리 서로 싸우는 건 우리를 가둔 놈이 바라는 것이에요.”


혜란 아줌마가 분위기를 중재했다. 아무래도 그냥 놔두면 한바탕 벌어질 분위기라 나도 말릴 참이었는데,

아줌마가 적절한 때에 나서줬다.


“죄송합니다.”


호영 씨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왠지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근데 이 돈이 가짜 돈일수도 있지 않나요?”


“흠, 그럴 수도 있지”


나의 물음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걸 의심해볼 필요가 있었다.

가둬놓고 폭탄을 설치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갑자기 1억을 준다니,

생각해보니 완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돈은 진짜로 보여 지는데요?”


은혜 씨가 말하자 모두가 은혜 씨를 바라봤다.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철이 아저씨가 약간은 따지는 투로 물었다.


“제 직업이 은행원입니다”


그녀의 말에 아무도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럼 잘 알겠네요? 얼만 큼 가져가면 1억인지? 돈 좀 세줘 봐요.”


상황을 지켜보던 날라리 고등학생이 돈뭉치를 꺼내 흔들어 보이며 은혜 씨에게 물었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에 은혜 씨를 비롯한 모두가 당황해했다.


“야, 돈 내려놓으라니까? 이 새끼가 돈독이 올랐나?”


순간 호영 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려 호영 씨를 잡았다.


“짝!!”


‘짝’ 소리와 동시에 날라리 학생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매서운 눈빛으로 학생을

노려보며 뺨을 날린 은혜 씨의 하얀 손이 있었다.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역시나 터프한 은혜 씨였다. 뺨을 맞은 학생은 처음엔 놀라더니 곧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친년이”


학생의 손이 올라가려는 찰나, 옆에 있던 철이 아저씨가 번개 같은 속도로 학생의 올라간 팔을

낚아채더니 뒤로 한 바퀴 돌아 꺾어버렸다.


“아!!”


순간적으로 고통스러웠는지 학생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놔, 놓으라고!!”


“계속 짧게 말할래? 공손하게 말해봐, 공손하게”


“미친, 내가…….”


철이 아저씨가 팔을 비틀어 올렸다.


“으아!!!”


아까보다 학생의 비명이 길어졌다. 꽤나 제대로 팔이 꺾여, 보는 나조차 고통스러웠다.

학생이 팔이 꺾인 채 울부짖자 철이 아저씨가 학생을 밀어 내동댕이쳤다.

학생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풀썩 쓰러졌다.


“내가 너 만한 자식이 있어 새끼야, 한 번만 더 말까면 팔이고 다리고 다 분질러 버릴 테니 알아서 해”


카리스마. 딱 이 단어가 떠올랐다.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학생이 아저씨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쪽팔렸는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통쾌했다.


“이제는 놔도 괜찮은데”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내가 호영 씨의 두 팔을 잡고 있었다. 얼른 그에게서 손을 뗐다.


“아, 죄송해요”


“아뇨, 제가 죄송하죠. 이놈의 욱하는 성질을 고쳐야하는데”


호영 씨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돈은 여기에 두는 겁니까?”


머리 긴 남자가 손가락으로 돈을 가리키며 물었다. 돈에 욕심이 생긴 모양인지, 좀 전처럼 투정 섞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질문에 복도 중앙에 있던 모두가 서로를 둘러보며 암묵적으로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는 약속이라도 한 거처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두는 거라면 누군가 지켜야하지 않을까요?”


“꼭 지킬 필요가 있나요? 역할놀이가 끝나면 모두가 똑같이 1억씩 나눠가질 텐데”


내 대답을 들은 할아버지가 코웃음 쳤다.


“젊은이는 모두가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안타깝게도 모두가 살아남을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자네도 봤을 거 아냐? 문 앞에 붙어있는 쪽지와 자네의 역할. 설마 이게 안전한 역할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 역할을 모르는 나로서는 움찔했다.










##7


“위험하지 않을까요? 녀석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안전하잖아요.”


상민의 말에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정말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상민씨는 가슴에 달린 폭탄이 위험해 보이지 않으십니까? 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폭탄 때문에 미칠 지경입니다. 그 미치광이의 놀이를 겪은 우리만이 경찰에게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망설일 틈이 없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그 잔인한 역할놀이에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형사의 차에 쪽지를 끼워 넣었습니다.”


“그게 다입니까? 별다른 거 없이?”


“어쩔 수 없습니다. 혹시나 경찰에 그 미치광이와 내통하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섣불리 행동했다가 놈에게 적발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그 형사는 믿을만합니까?”


“네,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실종사건을 뛰어넘어 그 이상에 접근한 유일한 사람이거든요. 상민 씨는 뭐 좀 알아보셨나요?”


재희의 물음에 상민이 종이쪽지와 볼펜 그리고 지도를 꺼내보였다.


“저는 간단히 추리를 해보았습니다. 재희 씨가 역할놀이가 끝나고 눈을 뜬 게 어디라고 하셨죠? 전라북도였나요?”


“정확히는 전라북도 남원이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그냥 도로 한복판에 누워있었죠.”


“제가 일어난 곳이 충청남도 공주 근처였고, 그 범인은 저를 처음 본 척하며 택시를 태워줬습니다. 그리고 저와 재희 씨가 나온 날짜는 같습니다. 그걸로 봐서 범인은 적어도 전라북도 밑의 지역에서부터 올라왔다고 볼 수 있죠.”


상민은 지도에 표시를 하며 설명했다.


“그렇다면 밑에 지역부터 차근히 찾아보면 수월하겠군요.”


“하지만 저희로서는 힘들겠죠? 가슴에 폭탄이 달려있으니, 범인을 찾더라도 발각되는 즉시 죽을 테니까요. 게다가 녀석은 변장을 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찾기 힘들 거예요.”


“그놈 얼굴 기억해요?”


“솔직히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특유의 말투를 들어본다면 기억날 겁니다.”


“그럼 형사에게서 연락이 오는 즉시 녀석을 잡기 위한 작전을 시작합시다.”










###8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상황으로 전개되는 바람에 할 말을 잃었다.


“어이 꼰대, 팔다리 부러뜨린다며”


날라리 녀석이 방에서 다시나와 지껄였다. 하지만 누구도 학생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모두 그의 손에 들린 권총 때문이었다. 학생은 총구를 사람들에게 겨누며 말했다.


“이봐요, 학생 그 총이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끼리 총을…….”


혜란 아줌마가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허튼 수작부릴 생각하지 마, 난 진짜로 쏠 테니까 보다시피 내가 당신들보다 어려도 아주 막 살아왔고, 눈에 뵈는 거 없으니까, 그리고 거기 꼰대 둘 나한테 뭐 할 말없어?”


학생은 총구로 호영 씨와 철이 아저씨를 가리켰다. 아까 전 일의 앙갚음으로 보였다.

얼굴을 보니 호영 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철이 아저씨는 뭔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순간 철이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너 인마, 총 쏠 줄이나 아냐?”


철이 아저씨는 도발과 동시에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의자를 발로 차서 학생에게 날렸다. 날아오는

의자에 당황한 학생은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탕!!”


“꺄아!!!”


요란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총알이 빗나갔는지

다친 사람은 없는 걸로 보여 졌다. 고개를 돌려 학생 쪽을 보니, 철이 아저씨가 학생을 넘어뜨리고

총을 빼앗고 있었다. 나와 호영 씨는 재빨리 달려들어 철이 아저씨를 도와 학생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으, 이거 놔!!”


이윽고 철이 아저씨가 완력으로 총을 빼앗아냈다. 그 때 뒤에서 은혜 씨의 소리가 들렸다.


“조심해요!!”


그 말에 나와 철이 아저씨가 물러났다. 뒤에는 머리 긴 남자가 의자를 높이 들고 학생을 내려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 돼!!”


할아버지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머리 긴 남자는 사정없이 학생의 머리를 의자로 내리찍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머리 긴 남자는 그 후로 몇 차례 더 학생의 얼굴을 내려찍었다. 우리가 서둘러 그를 말렸지만 이미

학생은 즉사한 걸로 보여 졌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우릴 죽이려고 했어요!!”


머리 긴 남자가 더 큰소리로 소리쳤다.


“푸하하하하!! 이거 역할을 왠지 잘못 정한 거 같네요, 캐스팅미스입니다.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너무나 빨리 죽었네요.”


스피커에서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음이 나냐? 쓰레기 같은 놈아!!”


철이 아저씨가 천장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게 성질부리지 마시고 학생의 바지나 좀 확인해주시겠어요?”


“싫다면?”


“죽고 싶으세요?”


스피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철이 아저씨도 그걸 느꼈는지 혀를 차며 스피커가 시킨 대로 학생의

바지를 뒤졌다. 그리고 학생의 바지에서 종이를 하나 꺼냈다.





당신의 역할은 형사입니다.

총으로 악당들을 무찔러 주세요.

(총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상자에 있습니다.)






“유태수 학생의 역할은 형사였습니다. 아, 모두들 학생의 이름도 모르고 계셨죠? 그나저나 안타깝네요, 불량학생이 갱생해서 멋진 형사가 될 줄 알았는데 총을 이딴 식으로 사용하다가 죽다니 정말 실망했습니다. 형사도 죽었으니 이제 악당들이 마음껏 날뛰겠네요. 하하하 그럼 이런 식으로 역할놀이를 계속해주세요. 저는 이만”


ㅡㅡㅡㅡ

스피커가 꺼지고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복도 중앙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봤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눈 움직임, 그 혼란스러운 시선들이 결국 피 묻은 의자를 쥐고 있는

머리 긴 남자에게서 멈추었다.


“재욱 씨,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지금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 잠깐! 위험한 놈이었다고, 사람들을 죽이려고 총을 들고, 방아쇠까지 당겼다고 다들 놈이 총 쏜 거 못 본거야? 하마터면 다른 사람이 죽을 뻔했어, 내가 모두를 구한 거라고 왜 날 그딴 식으로 보는 거야?”


호영씨의 질책에 재욱이라는 머리 긴 남자는 당황하며 대꾸했다.


“하지만 이미 총을 빼앗은 후였어. 당신도 봤잖아”


“모르는 거야, 녀석이 다시 난동을 피울지 누가 알겠어?”


“일단 그 의자부터 집어치우세요.”


은혜씨가 재욱씨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재욱씨의 손에는 아직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의자가

들려있었고, 그 의자를 틀어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 3초간 재욱씨가 은혜씨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의자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턱!!”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나가떨어졌다. 그 소리에 놀란 혜란 아줌마는 고개를 돌렸고, 은혜씨 역시

살기 가득한 재욱씨의 시선을 피했다.


“잠깐만요!!”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소리 질렀다. 뭔가 또 불길한 일이 터질 거 같아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순간 주변이 잠잠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지금 이렇게 서로 싸운다고 해결되는 것이 있습니까? 지금 재욱씨에게 죄를 추궁해도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재욱씨도 죽이실 겁니까? 재욱씨가 죽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잖아요. 모두 진정들 하세요.”


재욱씨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지만”


호영씨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살짝 신경 쓰였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말하려고

앞으로 나서는데 발에 뭔가 채였다. 밑을 보니 유태수의 다리가 있었다.


"진정하는 것도 좋은데 일단 여기 있는 시신부터 처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철이 아저씨가 죽은 유태수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흠, 그게 순서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나와 철이 아저씨 그리고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시신을 수습했다. 우리는 시신을 들어 복도 끝으로

향했다. 나는 아무런 힘없이 축 늘어지는 시신의 팔뚝을 잡았는데 그 느낌은 평생 잊지 못할 거 같다.

죽어있는 것의 촉감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불쾌했다. 할아버지는 복도 끝에 둔 시신의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게 했다. 마땅히 둘 곳이 없어 그냥 방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둔 거였는데 고개가

복도 중앙을 보고 있어서 왠지 꺼림칙하셔서 그러셨다고 했다.

혜란 아줌마와 은혜씨, 두 여자는 충격을 받았는지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방에서 가끔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울음소리가 들린 거 같았다. 재욱씨는 철문 앞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다가가 말을 걸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렸다. 혼자 놔두라고. 나와 철이 아저씨 그리고 호영씨

그리고 자신을 강현구라고 소개한 할아버지 이렇게 넷이서 복도 중앙의 탁자에 빙 둘러앉아서 시간을

때웠다. 침묵 그리고 침묵. 그 침묵이 답답했지만 딱히 이들과 나눌 이야기도 없었고, 수다를 떨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에는 애매했다. 어른도 계시니.


“잠깐 확인 할 게 좀 있어서”


순간 철이 아저씨가 의자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그리고는 복도 중앙을 이리저리 혼자 살피며 돌아다녔다.

고개를 숙여 탁자 밑을 보다가, 벽을 따라 걷기도 하셨다. 뭔가를 찾는 듯한 모습에 물었다.


“뭐 찾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 그냥 둘러보는 거야”


약간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한 철이 아저씨는 곧장 복도 끝에 있는 유태수의 시신 쪽으로 걸었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그 뒤를 따랐다. 아저씨가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뒤쫓던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는 표정을 짓고는 그대로 걸었다. 이윽고 시신 앞에 선 아저씨가 다짜고짜

유태수의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는 티를 걷어내었다. 그러자 유태수의 가슴팍에 부착된 폭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아저씨의 행동에 약간 놀람과 동시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지만 저렇게 막 다루면.

시체매너.

이 상황에서 시체매너라는 단어가 떠오르다니, 농담이 나와? 나란 놈아.


“뭐하시는 겁니까?”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태수에게 부착된 폭탄을 살폈다. 손으로 눌러보기도 하고, 코를 가져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도 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시체와 폭탄을 저렇게 이리저리 만질 수

없을 텐데, 도대체 뭐하다 온 사람일까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이 폭탄 진짜일까?”


“예?”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모르잖아”


아저씨가 턱을 매만졌다.


“그래서 확인해 보시려고요?”


“폭탄만 작동 안하면 우릴 가둬놓은 미친놈 말을 들을 필요가 없잖아, 그 역할놀인지 뭔지 할 필요가 없다니까, 폭탄이 가짜면”


철이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금 폭탄을 이리저리 살폈다.


“흠, 수제폭탄 같은데”


“폭탄에 대해 잘 아세요?”


“그냥 조금, 군대 안 갔다 왔나봐?”


“네, 아직 안 갔다 왔어요. 가기 싫었었는데 지금은 가고 싶네요.”


“허허, 이런 상황에서 농담도 하고 대단하네.”


“뭐, 그냥”


시체매너 농담을 할 걸 그랬다.


철이 아저씨가 천장을 바라봤다.


“어이, 이봐 이 유태수 학생 폭탄 좀 터뜨려봐”


우리를 가둔 녀석에게 말한 것이었지만 스피커는 조용했다.


“뭐야? 감시 안 하고 자리 비운 거야? 빨리 폭탄 터뜨려봐 진짜인지 확인해보게”


“에에헴, 마이크 테스트. 뭘 갑자기 불어내고 그래요?”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녀석은 우리를 24시간 감시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녀석은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긴, 사람들을 납치하고 감금하고 폭탄을 달고 하려면 혼자로선 역부족일터.


“여기 죽은 학생 폭탄 작동시켜봐”


“제가 왜요?”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철이 아저씨 표정이 굳었다.


“이 폭탄이 가짜면 누구도 네 놈 말은 듣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확인시켜봐 네 놈이 우리목숨을 가지고 놀 수 있나 없나”


“하하하, 역시 의심 많으시네. 그거 직업병 아니에요? 그럼 좀 뒤로 나와 보세요.”


스피커가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뒤로 나오라고요”


나와 철이 아저씨는 얼떨결에 뒷걸음질 쳤다.


“펑!!!!”


순간 폭발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고, 터짐과 동시에 유태수의 피와 살점 따위가 나와 철이 아저씨에게

다 튀었다. 위력은 굉장했다.


“또 무슨 일이”


“이게 무슨 소립니까?”


소리를 듣고 놀란 호영씨와 할아버지가 달려왔다. 둘은 본의 아니게 피투성이가 된 우리 모습을 보고

꽤나 놀란 것 같았다.


“조심들 하세요. 폭탄 진짜네요.”


피투성이가 된 철이 아저씨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폭탄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려고 위에 놈한테 이 학생 폭탄 좀 터뜨려 보라고 했습니다."


철이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죽은 사람 몸뚱이를 가지고 이러면 쓰나!!”


할아버지가 노하셨다.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시며 터져버린 시체를 씁쓸히 내려다 보셨다. 그리고는

말없이 유태수 학생의 시신을 수습하셨다. 수습하시는 걸 도와드리려 다가갔지만 할아버지는

‘돌아가게’

라는 말을 하실 뿐이었다. 철이 아저씨 역시 멋쩍어하며 그 자리를 맴돌다가 이내 그곳을 피했다.





##9



꽤나 허름한 지하방. 그곳에서 재희와 상민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형사님을 만나기로 한 장소가 여깁니까?”


상민의 물음에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겼죠?”


“외모가 중요합니까?”


“아뇨, 그래도 알아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상민의 물음에 재희는 이번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저도 사실 얼굴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젊은 형사입니다.”


“그나저나 이런 지하에서 왜 보자는 겁니까? 음산한 건 그때 이후로 질색인데 의심스럽네요.”


“형사님도 다른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오는 거라 조용히 만나야 한다고 하셔서, 형사님은 우리를 도우는 것도 있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납치 되서 역할놀이를 하고 있을 사람들을 구해내는 게 주목적입니다. 아직 우리를 신뢰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카페같은 곳에서 보고 싶습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이 사건에 감을 잡은 형사 같은데, 한 번 믿어 봅시다.”


“감만 잡았지, 역할놀이가 뭔지도 모를 텐데요.”


“똑똑똑”


순간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10



방에 들어가 화장실에서 얼굴과 옷에 묻은 유태수의 피를 닦았다. 쉽게 닦이지 않아 빡빡 문질렀다.

세면대를 따라 흐르는 핏물을 보자 유태수에게 달려있던 폭탄이 터지는 끔찍한 장면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런 폭탄이 내 가슴에도 달려있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몸이 굳어졌다.


“으으으”


나도 모르게 몸서리쳐졌다. 그래도 세수를 하고나니 정신이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꼬르륵”


이런 상황에서 배도 고플 수 있구나. 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방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았다.

설마 며칠 동안 가둬놓으면서 굶기는 것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방을 뒤졌는데 다행히 쉽게

빵과 물을 찾을 수 있었다.


‘아, 밥 먹고 싶다.’


대충 배를 채우고 방문을 조금 열어 복도를 살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문을 닫고 문을 잠갔다.

제대로 잠겨있나 2번 3번 확인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분명히 스피커가 말했었다.


‘형사도 죽었으니 이제 악당들이 마음껏 날뛰겠네요. 하하하’


악당이 과연 누굴까? 어떤 악당들일까? 설마 내가 악당일까? 아직 내 역할도 모르는 나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일 부터는 이 역할놀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마음먹고 잠을

청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이 떠졌다. 방음이 잘된다고 생각했는데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무래도 방문 바로

앞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누군가 다투는 소리, 불안감이

음습했다. 혹시나 하며 혼자 잔인한 상상을 하다가, 조용히 일어나 방문에 귀를 가져갔다.


“어서 주세요.”


혜란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됩니다.”


철이 아저씨도? 슬쩍 방문을 열었다. 바깥을 보니 철이 아저씨와 혜란 아줌마가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여자들이 총을 가지고 있어야 되요. 남자보다 약하니 무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총도 제대로 못 다루면서 무슨 총을 달래요? 예?”


“그럼 그쪽은 총을 무슨 전문가처럼 다루시나 봐요?”


“예, 전문가처럼 다룹니다. 됐죠?”


어제 유태수에게서 빼앗은 총이 문제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유태수에게 총을 빼앗은 철이 아저씨가

어제부터 계속해서 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고, 혜란 아줌마는 그게 불만인 듯 했다.

둘이 말싸움하는 게 팽팽해 보였지만 서서히 균형의 추가 아저씨 쪽으로 옮겨졌다.


“아줌마 군대 안 갔다 왔죠? 남자들은 군대에서 사격술 다 배워요. 괜히 사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사고 나요. 특히 아줌마 같은 사람.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건 제 총입니다.”


철이 아저씨의 깔보는 말투에 혜란 아줌마가 발끈했다.


“그게 왜 아저씨 건데요? 주세요. 그리고 군대에서 권총 써요?”


“군대 안 갔다 왔죠? 전 갔다 왔습니다. 누가 더 군대에 대해서 잘 알까요?”


“아휴 정말!!”


아줌마는 답답했는지 혼자 소리쳤다.


“절대 못 줍니다.”


“두 분 그만들 하세요.”


어쩐지 내가 나서야 될 거 같아서 말렸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요, 아줌마 그만해요, 이제 그만 좀 합시다.”


내 말에 맞장구치며 아저씨가 말했다.


“그래요, 한 가지만! 딱 한 가지만. 아저씨가 총을 다룰 줄 안다고 쳐요. 알았어요. 군대에서 배웠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저씨가 가지고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다른 남자들도 있는데, 왜 꼭 아저씨가 가져야하죠? 아저씨가 위험한 역할일수도 있잖아요?”


혜란 아줌마의 반박이 거셌지만.


“위험한 역할? 그럼 벌써 아줌마 쐈겠죠?”


“뭐라 구요?!!”


왠지 이 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저씨 아줌마 진정들 하시라니까요.”


“그냥 놔두세요. 아까부터 계속 저러고 있네요.”


은혜씨가 말리는 나를 말렸다.



소란스러움을 피해 중앙복도로 가니 재욱씨와 호영씨가 금고 주변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뭐하세요?”


“돈이 잘 있나 확인하는 거예요. 액수에 변함은 없겠죠? 누가 밤에 몰래 가져가거나 그러지는 않았겠죠?”


내가 처음 생각했던 호영씨의 이미지와는 조금 상반되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 호영씨가 이렇게 돈에

집착할 거라고는. 물론 호영씨 말고도 한 사람 더 있지만.


“물론 돈도 좋지만 굳이 지킬 필요까지야, 그리고 돈보다 안전이 우선인데”


“여기서 감금되어서 못 볼꼴도 보고, 사실 납치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보상은 받아야죠.”


“그건 그렇지만 놈이 돈을 준다고 약속은 했지만 믿을 사람을 믿어야죠.”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따지면 이곳에도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호영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재욱씨를 힐끔 쳐다봤다. 역시나 아직도

재욱씨가 불편한 듯 했다. 나 역시 그렇지만.


“근데 지금 여기에 갇힌 사람이 8명에서 7명이 되었잖아요? 원래 8명이 8억을 1억씩 나눠 갖는 거였는데, 한 명이 죽어서 1억이 남잖아요. 그럼 모두가 균등하게 나누기 힘들어지는데 남은 1억을”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호영씨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사실, 유태수를 죽인 재욱씨 본인이 그런 말을 하는 게 나 역시 달갑지는

않았다. 어제 자신이 죽인 사람의 몫을 나눠 가지겠다는 심보 자체가 글러먹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지만

재욱씨는 그걸 모르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그 1억을 나누지 말고 한 사람한테 몰아주는 건 어떨까요?”


나와 호영씨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젊은이가 뭘 그렇게 돈에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구만”


묵묵히 앉아서 지켜보던 현구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니, 제가 빚이 좀 있어서”


재욱씨는 여전히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했다. 이 사람은 눈치가 결여된 사람

같다. 뭔가 위험한 냄새가 나는 사람.


“젊은 나이에 돈에 욕심을 가지면 못 써”


“그럼 할아버지 몫을 제가 좀 가져도 될까요?”


웃으며 말하는 재욱씨였지만 그런 걸 용납할리 없는 할아버지였다. 그나저나 어제 사람 죽인 사람이 맞나?

할 정도로 태연한 모습의 재욱씨를 보니 소름이 돋았다.

이런 사람과 며칠 더 같은 공간 안에 있어야 하다니.


“자네 정말 미쳤나?”


“돈에 욕심내는 게 뭐가 미친 겁니까? 그럼 이 세상사람 모두 미쳤게요? 안 그래도 지금 참고 있는 겁니다. 이 돈 내가 다 가질 수도 있는데, 이거 가져가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저런 쯧!”


할아버지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셨는지 혀를 내두르며 돌아앉으셨다.


“아 지루해. 악당들 뭐하는 겁니까? 왜 이렇게 평화로워요? 역할 제대로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


잠자코 있던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역할놀이가 끝나면 풀어주는 게 확실 한 거요?”


호영씨가 진지하게 물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으면 풀어주죠. 뭐, 생존자 중에 제일 역할을 수행 못한 사람은 남아서 또 해야겠지만”


“생존자라는 말이 거슬리네요.”


반짝거리는 카메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람가지고 장난치는, 저 쓰레기보다 못한 놈의 장난감이 된

기분에 울컥했다.


“거슬리라고 말한 겁니다. 하하하. 뭐 오늘 밤이 지나면 슬슬 역할들을 수행하시겠지요? 저 기대하겠습니다.”


“꺼져!! 이 미친놈아!!”


천장을 향해 한 바탕 소리를 지르고 카메라 쪽을 보니

철이 아저씨가 가운데 손가락을 카메라에 날리고 있었다.






“저기, 우리 토론 좀 할까요?”


방에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은혜씨가 불렀다.


“에? 무슨 토론이요?”


“그냥 여기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람들이요?”


“좀 더 자세히는 역할에 대해서요.”


어쩐지 은혜씨의 표정에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서로의 역할에 대해 말하는 건 뭔가, 처음부터 서로들

암묵적으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묻지 않았다. 마치 꼭 지켜야 하는 룰을 두고 게임을 하듯 말이다.

그런 걸로 봐서 지금 그녀의 행동이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정말 토론이 하고 싶은 것인지,

뭔가 숨기고 있는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재간이 없었기에, 일단은 웃어넘겼다.

무엇보다 그녀가 내게 역할을 직접적으로 물어본다고 한들 나는 내 역할을 모르기에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가 없었다.


“에? 헤? 갑자기 역할은 왜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우리끼리만 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을까요? 은혜씨 만약에 제가 나쁜 역할이면 어쩌시려고”


“여자의 직감이에요. 왠지 당신은 위험해보이지가 않아서”


그녀의 얼굴에 방금 전의 섬뜩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아- 나 넘어가는 건가.

그녀에게, 아니, 그녀의 설득에 넘어가버린 나는 그녀와 함께 방에서 토론을 시작했다.


“지금 당신 그리고 나 아저씨, 아줌마, 할아버지, 호영씨, 기분 나쁜 남자 이렇게 7명이 있습니다. 아직 서로의 역할은 모르고 있고. 일단 나와 당신은 위험하지 않다고 간주하고”


떨칠 수 없는 의문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니, 저는 은혜씨의 직감으로 위험하지 않다고 치더라도, 은혜씨가 위험한지 위험하지 않은지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남자는 직감이 없나 봐요. 딱 느낌 안 와요? 그리고 위험하다 한들 저같이 연약한 여자가 위험해봤자 얼마나 위험하겠어요?”


“연약하더라도 어제 그 학생처럼 권총 같은 무기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은혜씨가 연약하진 않잖아요. 라는 말이 입에 맴돌았지만 그냥 참았다.

어제 있었던 일이나 그녀의 말투나 행동은 웬만한 남자 못지않기에.


“그런 의심이 있는데 저랑 방에 단 둘이 왜 있어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 아닐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녀가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뭐든지 의심한 필요는 있기에

경계를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알았어요. 일단은 그렇게 해두죠. 그럼 누구부터 알아볼까요?”


“서로 위험해 보이는 사람부터 뽑을 까요?”


“무슨 근거로요? 직감이요?”


“대충 감도 좋고, 사람들 관찰했을 거 아니에요. 어떤 역할인지 나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하긴, 아직까지는 딱히 특별한 일이 없긴 하네요.”


“사람들의 역할을 추리해내기 전에 이 역할놀이에 어떤 역할이 있을지 먼저 생각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역할이요?”


“그래요 분명 8명에게 역할을 주어졌을 것이고, 그 역할들은 전부 이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일 거예요. 지금 유일하게 역할이 공개된 건 유태수 학생의 역할인데 그것에서부터 유추해보면 대충 어떤 역할들이 있을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오호, 되게 똑똑 하시네요. 계속 해봐요.”


“일단 유태수의 역할이 형사였잖아요. 형사라는 역할이 있다면 그에 상반되는 역할이 있겠죠? 우릴 가둬놓은 놈이 말한 소위 ‘악당’이라 불리는 자들. 그때 스피커에서 분명히 ‘악당들’이라고 했거든요.”


“적어도 2명이상이 악당이라는 소리네요”


“아직 악당의 역할은 모르지만 사람들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형사 역할에게 총을 줬을 정도면 그들에게도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흠, 그렇다면 그들은 왜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어떤 거요?”


“복도 중앙에 놓인 돈, 단순히 역할을 끝내고 받는 상금이라는 느낌보다는 왠지 돈을 걸고 하는 생존게임일 거라는 느낌이 드네요. 그 돈과 관련된 역할도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하다보니 저 혼자만의 추리를 떠들고 있네요.”


“흠 2명이상의 악당역할과 돈과 관련된 역할이라 눈에 띄게 돈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뭐 이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겠지만”


“재욱씨요?”


“원래 돈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역할 때문인지”


“그 사람은 원래 돈을 좋아하는 사람 같은데”


“차라리 그 사람이 악당역할이었으면 좋겠네요. 배신감 느끼지 않도록”


“하하, 전 불안한데? 근데 은혜씨는 뭐 역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 거 없어요? 먼저 토론 하자고 하셨는데”


“호호, 딱히 없네요. 나중에 뭔가 감이 오면 말씀드릴게요. 직감은 정확한 편이니까,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럼 이만”


에? 은혜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왠지 그녀가 가장 수상해진 건 기분 탓일까?

아니면 이것이 직감이란 걸까?










“탕!!”


단발의 총성에 놀라 일어나다가 침대에서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는 동태를 살폈다.

총성 이후에 계속 되는 정적 속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밖으로 나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총성이후

이어진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에 발이 바닥에 붙어버렸다. 지금 내가 느끼는 공포는 확실했다. 무섭다.

총이라면 철이 아저씨가 가지고 있었을 텐데, 아니 어쩌면 다른 누군가 역시 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복도로 하나 둘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상황이 진정됨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바깥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문 앞에는 뭔가에 홀린 표정을 한 혜란 아줌마가 총을 들고 서있었다.


“뭐가 어떻게”


뒤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복도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혜란 아줌마의 반대편에 서서 그녀를 조용히

응시했다. 5:1의 대치상황. 불리함을 깨달았는지 혜란 아줌마가 소리쳤다.


“이건 실수야 정말이야, 그 사람 잘못이라고!!”


혜란 아줌마는 호소했다. 확실히 그건 호소였다.


“아줌마, 그 총은 뭐예요? 도대체 무슨”


은혜씨가 말을 하다 눈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문이 열려있는 방이었다.

그곳은 바로 철이 아저씨의 방이었다.


“설마, 총을 빼앗으려고”


은혜씨가 재빠르게 철이 아저씨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대체 왜일까? 그녀가 방에 들어가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혜란 아줌마 역시 묵묵히 그녀의 동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걱정이 된 나는 방

앞으로 가서 섰다. 방안에는 피로 얼룩진 채 쓰러져있는 철이 아저씨, 그리고 피 묻은 쪽지를 든

은혜씨가 서있었다. 뭔가 멍한 표정의 은혜씨였다.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뭔가 의아해하는 표정이 뒤섞인 표정.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은혜씨가 중얼거렸다. 은혜씨는 쥐고 있던 쪽지를 내게 주었고, 그곳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당신의 역할은 탐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역할을 추리하세요.

역할놀이가 끝나면 시험 볼 겁니다.





“아저씨는”


뒤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줌마 뭐라도 말 좀 해봐요. 왜 그런 짓을 설마 아줌마가”


“아냐, 난 그저 총이 필요했어. 근데 그만 실수였어, 정말이야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아무리 총이 필요했어도, 다른 사람들 몰래 철이 아저씨 방에까지 들어가는 행위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분명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됐으니까 진정하고 일단 총은 내려놓으세요.”


“그건 안 돼!”


총을 가지려 다가가자 순간 혜란 아줌마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리고 아줌마가 들고 있던 총의 총구가

우릴 향했다. 모두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잠깐만요, 아주머니 진정하세요,”


“맞아요, 일단 말로 풀어요. 총 내려놓으세요.”


“됐어 이제! 나쁜 놈들 너네 들한테 무기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빨리 내놔”


아줌마는 무언가 단단히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진정하세요, 아주머니”


“칼 2자루, 알고 있으니까 내놔. 내일 아침까지 시간을 주겠어. 내일 내 방 앞에 칼 2자루를 가져와 마지막 경고야”


지금까지 악당은 없었다. 유태수 학생, 철이 아저씨. 둘 다 형사와 탐정, 어떻게 보면 정말 필요한

역할들만 사라져버렸다. 설마 애초에 악당이라는 역할 자체가 없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리를 가둔 놈은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을 이용해 사람들끼리 서로 불신해서, 결국에는 서로를 죽고

죽이는 모습을 바랐던 건 아닐까? 아니면, 혹시 어쩌면, 정말 내가 악당 역할인 걸까?

커져가는 의구심에 방안을 샅샅이 뒤져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았다. 혜란 아줌마가 말한 칼은커녕

위협될만한 도구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틀이 지났다. 어찌어찌 이틀은 그냥 넘겼지만 이렇게

역할도 모른 채,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도무지 잘 수가 없어 방문 앞에서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따금 누군가의 발자국소리가 들렸지만 확인하지는 않았다.

악당이라는 놈들이 자발적으로 칼을 혜란 아줌마 방에 놓길 바랄 뿐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이 떠졌다. 고막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날카로운 비명. 혜란 아줌마의

비명소리였다. 내가 졸았었나? 나도 모르게 문고리를 잡아 일어섰지만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함에 멈칫했다. 뭘까? 무슨 일이지? 무턱대고 나갔다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침착하게 행동했다. 누군가 아줌마를 공격했나? 아니면 내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나?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 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큰일 났어요!”


문 앞에는 다급한 모습의 은혜씨가 있었다. 복도로 나가니, 총을 들고 경계하는 혜란 아줌마가 있었고,

그녀의 방 앞에는 칼이 꽂혀있는 현구 할아버지의 시체가 있었다.


“다 나와!! 어서 내 눈 앞으로 다 나와!!”


이성을 잃은 혜란 아줌마가 총구를 여기저기 겨누며 소리 질렀다.


“아줌마 진정하세…….”


“닥쳐!! 지금 몇 명이야! 하나, 둘, 셋 하나 어디 갔어?”


아줌마는 한명한명에게 총구를 들이밀며 숫자를 세었다. 나, 은혜씨, 재욱씨 죽은 유태수와 철이 아저씨,

현구 할아버지 그리고 혜란 아줌마를 제외하면 1명이 부족했다.


“한 명 어디 갔냐고!!”


호영씨가 없었다.


“제가 불러올테니 제발 가만히 좀 계주세요”


“빨리 데려와!!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야겠어.”


나는 당장에 호영씨 방으로 가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놀라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으아아아아!!”


혜란 아줌마를 제외한 모두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 역시 내 시선을 따라 그것을 보았고,

그들 역시 놀라 경악했다. 호영씨의 방안에는 상반신이 터진 채 쓰러져 있는 호영씨의 시체가 있었다.


“도대체 어젯밤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뭐야? 무슨 일이야?”


궁금했는지 혜란 아줌마가 총을 들고 다가왔다.


“호영씨가 죽어버렸네요”


“죽다니?”


순간 은혜씨가 호영씨의 방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했다.


“은혜씨 뭐하세요?”


방안을 뒤지던 그녀는 급기야 호영씨의 남은 사체를 뒤적였다. 그녀는 죽은 호영씨의 바지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쪽지였다.


“호영씨의 역할은……?”


그녀는 그때처럼 나에게 다가와 쪽지를 건넸다.






당신의 역할은 금고지기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금고에 있는 8억을 지키세요.

금고에서 1원이라도 빠져나가는 즉시 폭탄이 터질 겁니다.





“다들 멈춰!!”


가만히 있던 혜란 아줌마가 다시금 총을 들어 우리를 몰아세웠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은 그 사람 역할이 뭐였지?”


혜란 아줌마가 총구로 시신을 슬쩍 가리키며 물었다.


“금고지기입니다.”


“그럼 내 방문에 칼 꽂혀 있던 할아버지는?”


“아직 확인을 안 해서 모르는데”


“다들 천천히 나와”


혜란 아줌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를 복도로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은혜씨를 지목했다.


“가서 저 할아버지 역할 확인해봐, 칼은 건드리지 말고”


은혜씨는 쓰러져있는 현구 할아버지의 옷가지를 뒤적였다. 그리고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쪽지를 찾아

꺼냈다.


“뭐라고 쓰여 있지?”





당신의 역할은 시체처리반입니다.

시체가 생기면 칼로 썰어서 중앙복도의 구석에 있는 수거함에 넣어주세요.

(칼은 침대 밑에 있습니다.)





그래서 유태수 시신을 폭파시켰을 때 화를 낸 거였나? 잠깐, 그렇다는 건 스피커의 말이 맞다는

전제 하에 여기 넷 중에 2명 이상이 악당이라는 소리?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아, 이거 녹화테이프를 봐야하나? 그나저나 이제는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역할 확인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네요. 보기 좋습니다. 하하하”


꽤 나쁜 타이밍에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닥쳐봐, 생각 좀 하게”


구석에 박혀있는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마치 그녀석의 눈을 보며 말하는 것처럼.


“아, 제가 역할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었나 보군요. 그럼 관객은 닥치고 있겠습니다.”


스피커가 꺼지고 정적이 이어졌다. 저마다 머릿속에서 수 가지를 계산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머리를 엄청 굴리고 있었다.


“당신들 셋 중에 악당이 있어. 그리고 악당은 남은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있겠지. 할아버지를 죽여 내 방 앞에 두면 내가 겁먹을 줄 알았겠지만, 절대 아냐 사람 잘못 건드렸어.”


혜란 아줌마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무서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총알은 충분해, 지금 여기서 모두를 쏴 죽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혜란 아줌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줌마, 잊었어? 당신 죄 없는 아저씨 쏴 죽였잖아 총 빼앗으려고”


순간 잠자코 있던 재욱씨가 무척이나 대담한 투로 말했다.


“뭐, 뭐라고? 그건 실수였어, 내가 넌 줄 알아? 이 살인자야?”


“그렇게 따지면 나도 실수였어!! 내가 살인자면 당신도 살인자야!!”


재욱씨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말했다. 나와 은혜씨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숨죽여 지켜볼 뿐이었다.

괜히 총을 든 사람을 자극했다가는 큰일이 나는 수가 있었기에.


“아니야! 그래, 네가 죽였어. 네가 할아버지랑 호영 학생을 죽였어. 그리고 네가 돈도 훔쳤어. 맞지? 처음부터 알아차려했어!! 이 나쁜 놈!!”


혜란 아줌마는 극도로 흥분했다.


“쳇”


순간 재욱씨가 외투에 손을 넣었고, 혜란 아줌마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쏜 터라 총알은 그에게 정확이 날아갔다. 그는 즉사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혜란 아줌마는 벽에 기대어 천천히 앉았다. 총을 든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은혜씨는 그런 와중에 재욱씨의 품을 뒤졌다.

과연 재욱씨는 무엇을 꺼내려던 것이었을까?

은혜씨는 재욱씨의 외투 속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었다.





당신의 역할은 살인자입니다.

형사의 눈을 피해 사람들을 죽이세요.

죽인 사람의 돈은 당신의 몫이 됩니다.

(칼은 침대 밑에 있습니다.)





역시 예감은 정확했다. 혜란 아줌마도 쪽지를 읽고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한 가지 위험요소가 제거 되었다는 생각에 우리는 만족했다.

아줌마는 그녀가 원하는 남은 칼 1자루를 찾으려고 일어나, 재욱씨의 방으로 향했다.

나와 은혜씨 역시 그가 훔쳤을 거라고 예상되는 8억을 찾기 위해 아줌마를 따랐다.

칼은 쪽지내용대로 침대 밑에 있었다.

정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한 채로 침대 밑에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8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내 머릿속에 ‘악당들’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숨이 막혀왔다. 이 두 여자 중에 하나, 아니 어쩌면 이 두 여자 모두가 악당, 정말 최악이라면

내가 악당일지도 모른다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서로 얽혀 머리를 어지럽혔다.


“잠깐만요, 칼 하나는 현구 할아버지의 것, 그리고 하나는 재욱씨 것이잖아요.”


은혜씨가 입을 열었다.


“네”


“그럼 재욱씨가 할아버지의 칼을 빼앗아 죽인 걸까요?”


“굳이 칼을 빼앗을 필요 없이 자신의 칼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너무 많아요. 역할 자체도 각자 겹치는 역할이 있는 거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도?”


“예?”


은혜씨의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은혜씨가 악당인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들킨 것 같아 혼자 놀랐다.


“그나저나 돈은 어디 있는 걸까요?”


우리는 중앙복도로 향했다. 상자, 금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혜란 아줌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날 한 번 바라봤다. 아무래도 날 의심하는 듯 했다.


“내일이면 마지막인데 의문이 많네요.”


아, 드디어 내일이면 끝나는 건가? 아직 내 역할도 모르는데. 이러다가 역할 수행 못했다고 폭탄이

터지거나 역할 못 했다고 다시 하면 어쩌지?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그쪽 방을 뒤져도 될까요?”


역시나 날 의심하고 있었다.


“뒤져보세요.”


의심을 받는 건 기분이 나빴지만, 어쨌건 당당했기에 나는 허락했고, 그녀들은 내 방을 뒤졌다.

하지만 역시나 돈은 나오지 않았다. 그 후 공평성을 위해 은혜씨의 방 그리고 혜란 아줌마의 방을

찾았지만 돈은 나오지 않았다.


“학생, 의심해서 미안해요. 뭐 다른 비밀공간에 숨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정말 미안하시면 뒤에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우리 방에서 좀 쉬면 안 될까요? 머리가 좀 아프네요.”


은혜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모두가 지쳤을만했다. 하루 사이에 엄청난 일을 겪었고,

지금에서야 어찌 보면 평화를 찾았으니. 살인자 역할 재욱씨도 죽고, 무기도 모두 수거했다.

사실 나로서는 힘으로는 저 두 여자를 압도 할 수 있기에. 딱히 위협적인 존재는 없었다.

무기만 뺀다면.


“그럴까요?”


방으로 들어가서 세수를 좀 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문을 잠갔는지

확인했다.


“덜컥”


잠겨있다. 뭐든지 확실하고 안전한 게 좋은 거니까, 다시금 침대에 누웠고,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밤새 깨는 일없이 푹 잤다.







###12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간만에 제대로 잤다.


“무사하네요, 다들”


하루가 지나고 만는 그들은 모두 표정이 한층 밝아진 상태였다. 주변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거 치고는.


“이게 당연한 건데, 감사하게 되네요.”


“그럼 우리 돈부터 찾아볼까요?”


혜란 아줌마는 반가움보다는 8억이 중요한 거 같았다. 나와 그녀들은 각자 방을 맡아서 돈을 찾기로 했고

그것을 실시했다. 총 하나, 칼 두 자루를 얻고 나서 평화로워진 혜란 아줌마와 수상쩍기는 하지만

위험한 냄새는 나지 않는 은혜씨.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역할은 모르지만 내가 그 악당들 중 하나였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펑!!”


폭발소리가 났을 때 나는 할아버지의 방을 뒤지고 있던 중이었다. 망설임 없이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은혜씨나 혜란 아줌마 둘에게 문제가 생긴 듯했다.


“제길 안심 하는 게 아니었어.”


숨죽인 채 복도를 향했다. 은혜씨? 혜란 아줌마? 둘 중 하나는 악당이 분명했다. 사실 은혜씨가

내게 접근할 때부터 수상했다. 하지만 제발 아니길 바랐다.

순간 맞은편 방에서 숨죽인 채 복도를 응시하는 은혜씨가 보였다.


“에?”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혜란 아줌마의 폭탄이 터진 건가? 왜지?


“무슨 일이죠?”


“저도 잘…….”


“이야!!! 대단해요!!”


“으악!”


순간적으로 들려온 스피커 소리에 소리를 질렀다.


“역할놀이!! 4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드디어 끝났습니다.”


스피커에서 환호하는 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복도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피로 얼룩진 철이 아저씨였다.


“도대체 무슨”


“내 총을 돌려받았을 뿐인데, 아줌마 터져버렸어, 제길”


나와 은혜씨는 놀라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철이 아저씨는 우리와는 대조되는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날 밤, 아줌마가 방에 찾아왔어, 총을 달라고 자신의 목숨이 걸렸다며 다짜고짜 들어오더니 강제로 빼앗았어. 위험해서 돌려받으려고 나도 힘을 썼어. 약간의 힘 싸움 중에 총이 발사되었지. 순간적으로 손을 놓다가 쓰러졌어. 그걸 보고 내가 총에 맞아 죽은 줄 안거야, 덕분에 일이 많이 꼬였어. 원치 않게 할아버지도 죽였고”


“예? 할아버지를?”


“할아버지 역할이 공개되었잖아, 시체처리. 내가 시체가 된 줄 알고 칼을 들고 내 방으로 온 거야, 너무 놀라서”


철이 아저씨는 침을 크게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내가 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놀라서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철이 아저씨가 죽였다니.


“참 믿을 사람 없네요.”


“여기서 누구 믿는 게 이상한 거야”


“그럼 죽은 척은 왜……?”


“죽어있는 편이 역할을 수행하기 편했거든 뭐”


“탐정은 그냥 살아있어도 된지 않나요?”


“내 역할은…….”


철이 아저씨가 품에 손을 넣어 쪽지를 꺼내려는 순간.


“잠깐만요!!!!!”


스피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요?”


“이러시면 안 되죠. 아직 마지막 시험이 남았는데 동작 그만!!”


“시험이라면”


“저기 아저씨는 조용히 하시고, 젊은 남녀 두 분, 다른 사람들의 역할을 말해주세요.”


순간 빛이 스쳤다. 머리에서 그것이 떠올랐다.





당신의 역할은 탐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역할을 추리하세요.

역할놀이가 끝나면 시험 볼 겁니다.





역할놀이가 끝나면 시험 볼 겁니다. 그랬었나? 내 역할은 그거였었나?


“뭐, 둘이 잘 붙어다니 던데 둘 중 하나가 무조건 죽는 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둘 다 죽을 수도 있고, 둘 다 살 수도 있고. 그냥 제가 질문하면 동시에 대답해주세요.”


“네”


“네”


“뭐 죽은 사람들은 역할이 공개가 되었으니, 강현구 씨의 역할은?”


“시체처리반”


“유태수 학생의 역할은?”


“형사”


“김재욱씨의 역할은?”


“살인자”


“이호영씨의 역할은?”


“금고지기”


“문혜란씨의 역할은?”


혜란 아줌마의 역할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남을 해하려 하지는 않지만

무기는 필요하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으니 총을 달라고 할 정도.

게다가 무기의 종류별 개수까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무기수집”


“무기를 모으는 역할”


“뭐, 정확한 역할 이름까지 맞추라고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만, 뭐 두 분다 맞은 걸로 해드리죠. 그럼 그 다음 윤형철 씨의 역할은?”


“잠깐만요, 윤형철씨가 누구죠?”


은혜씨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당신들이 철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람이요. 저기 저 사람”


“아, 예”


은혜씨가 멋쩍어했다. 사실 은혜씨가 질문하는 순간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철이 아저씨의 역할은 공개가 되었다. 탐정이라고. 하지만 내 추리가 맞는다면.


“다시 갈게요. 윤형철씨의 역할은?”










“도둑”


나와 은혜씨는 대답을 하고 서로 바라봤다. 나는 은혜씨를 보며 다 알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처음부터 나는 중앙복도 금고에 있는 8억이라는 돈과 관련된 역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돈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돈을 훔치는 직업은 도둑.

그리고 철이 아저씨가 본인 입으로 방금 전에 말했다.


“죽어있는 편이 역할을 수행하기 편했거든”


그렇다. 철이 아저씨가 탐정이라면 굳이 죽은 척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도둑이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생기는 한 가지 의문.

그날 철이 아저씨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날 밤, 그날 그 탐정이라고 적힌 쪽지는 무엇이었을까?

난 그걸 간파했다.

나를 속이기 위한 은혜씨의 트릭.

그날 분명히 은혜씨는 나를 속이기 위해 철이 아저씨의 역할 쪽지가 아닌

자신의 역할 쪽지를 내게 건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말.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너무 많아요. 역할 자체도 각자 겹치는 역할이 있는 거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도?”


역할이 겹친다고? 나는 그것을 캐치했다.

김은혜, 이 수상스러운 것.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역할놀이를 못하신 분은 역할놀이를 다시하게 됩니다.





규칙.

서로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경우 경쟁할 걸 대비해 나를 속이려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녀가 내 역할이 탐정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된다.

내 추리로 그녀는 아마 내가 잃어버린 쪽지를 주었거나 훔쳤을 것이다.

그날, 역할놀이가 시작된 그날, 내가 쪽지가 없는 걸 확인하고, 방으로 가서 쪽지를 찾으려던 그날,

방에서 쪽지가 나오지 않아 한탄하며 방에 있을 때.


“똑똑, 나와 보세요, 모두 모였어요.”


쪽지를 찾으려 방을 뒤적이는데 은혜 씨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었다.

이때를 기억해 알아채냈다.





‘내 방은 어떻게 알았을까?’





첫날, 내가 방에서 들어는 것도 나오는 것도 안 보고 내 방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내 방에 들렀다는 거 아닐까?


[위험을 감지한 나는 일단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문고리를 돌렸다. 별 힘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문고리가 맥없이 돌아갔다. 예상 밖이었다.]






“대단들 하네.”


철이 아저씨가 품에서 꺼내려던 쪽지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당신의 역할은 도둑입니다.

금고에 있는 8억을 자신의 방으로 옮겨주세요.

도둑인 걸 들키면 안 됩니다.





“은혜씨 대단하시네요.”


“당신이라면 추리해 낼 줄 알았어요. 정말 멋져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보니 역겨웠다.


“와우, 이제 두 사람만 남았네요.”


“김은혜씨의 역할은?”


“탐정”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굳었다.


“탐정은 당신 역할이잖아요. 제 역할 몰랐던 거예요?”


뒤통수를 한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말도 표정도 모두 굳은 채 그녀가 꺼내 보여준 쪽지를 바라봤다.





당신의 역할은 흉내쟁이입니다.

아무나 한 사람 고르면 그 사람의 역할을 알려드릴 겁니다.

그 사람의 역할을 따라 해주세요.





“8억을 완벽히 훔친 윤형철씨와, 탐정을 완벽하게 흉내 낸 김은혜씨는 합격이네요, 근데 아깝네요. 하나를 틀리시다니 사실 맞춘거나 다름없지만”


스피커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정말 대단하시네요, 은혜씨, 자신을 위해 남도 속이고”


“예? 그게 무슨 말이죠? 전 속인 적 없는데?”


“끝까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시 한 번 역할놀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가 갈리고 속이 뒤집어 질 거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이곳에서 누군가를 신뢰한 게 잘못이었다.


“전 정말 속인 적 없어요.”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윤형철씨와 김은혜씨는 이제 나가시는 거네요. 여기 있었던 일들 밖에 나가서 입도 뻥긋하지 말아 주세요, 아시겠죠? 하하하”


스피커의 말에 철이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잠깐 한 가지 꼭 해야 될 게 있다.”


철이 아저씨가 가지고 있던 총을 들어 카메라를 향해 쐈다.


“탕!!”


“순간 쫄았네요. 하하하”


스피커가 경박스럽게 웃었다. 철이 아저씨가 들고 있던 총을 내게 던졌다.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냈다.


“이제 두 발 남았을 거야. 쏘고 싶으면 쏴, 그거 내 총이니까 조심해서 쓰고”


“아저씨 총?”


“진짜 내 총 맞아, 공포탄 2발 실탄 4발. 지금은 실탄 2발 남았을 거고, 처음 2발 공포탄 인거 보고 알았어. 탄두를 찾았는데 없더라고. 2발 남은 거 그냥 쏴버려 저 놈한테”


“이봐”


나는 경박스럽게 웃는 놈을 향해 소리쳤다.


“왜요? 당신도 쏘려고요? 에잇 내가 먼저 쏴야지, 하하하”


푸쉬이이이이.


순간 방에 가스가 흘러들어왔다. 가스를 마시자, 기분이 편안해 지고 몸이 나른해졌다.

졸음이 오기 전에 나는 중얼거렸다.


“아니, 이 총 다음 역할놀이에도 써줬으면 해서……,”


“알겠습니다. 최재희씨”


놈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들린다.




















"아저씨 너무 하네요, 재희씨 역할이 적힌 쪽지를 훔치다니, 저까지 속을 뻔 했네요."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딱 봐도 똑똑하게 생긴 애가 탐정인데 걸릴 거 같아서, 뭐 저 정도 녀석이면 살아남을 거야"










##14



재희와 상민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재희의 얼굴이 굳었다.


“오랜만이네, 최재희 군. 역시나 살아남았나보네”


윤 형사가 말했다.


“네, 덕분에요. 당신 방법을 써서 살았으니까, 아저씨는 여전하시네요. 아, 그리고 총은 잘 썼어요.”


“서로 아는 사이에요? 벌써?”


재희와 윤 형사의 귀에는 상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뜻밖의 재회.

아니, 예견되었던 재회.


“아무래도 조무래기 박 형사보다는 내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왔어”


윤 형사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재희와 상민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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